“부모님을 포함해 주변 모두가 말렸지만 쇼팽 콩쿠르를 통해 제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싶었어요.”
제19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에릭 루(27)가 24일 L7 강남 바이 롯데호텔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나 콩쿠르 재도전 배경과 음악 세계에 대해 들려줬다. 중국계 미국인인 루는 2015년 조성진이 우승했던 쇼팽 콩쿠르에 당시 17세로 출전해 4위에 올랐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 ‘재도전자 최초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루는 “재출전을 진지하게 고민한 건 지난해 초였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도전했다”고 말했다. 10년 전과 달라진 점으로는 음악적 확신을 꼽았다. 그는 “예전에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은지가 명확해졌다”고 했다. 재도전자에게 공식적 불이익은 없지만, 사람들의 높아진 기대치가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했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이번 대회 본선 3라운드에서 손가락 부상과 감기로 경연 순서를 조정해야 했다. 루는 “바르샤바 도착 순간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라운드가 최악이어서 기권하려고도 생각했다”며 “매니저의 격려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루는 스승 당타이손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드러냈다. 당타이손은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한 인물이다. 루는 “13세부터 21세까지 선생님께 배웠는데, 단순히 뛰어난 쇼팽 전문가가 아니라 정말 훌륭한 음악가”라며 “음악적 직관이 남다르며 연주에 대한 디테일이 정교해서 자연스럽게 내 기준도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쇼팽의 음악은 연주할 때 ‘생각’보다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감정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루의 우승 이후 조성진은 인스타그램에 축하 글을 올렸다. 루는 “그의 응원이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됐다”면서 “조성진은 10월 말 나의 베를린 필 데뷔 무대에 와서 다시 한번 축하해 줬다”고 전했다.
루는 지난 21일 레너드 슬래트킨이 지휘한 KBS 교향악단과의 협연에서 쇼팽 콩쿠르 결선 당시 선택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해 클래식 애호가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오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쇼팽 콩쿠르 5위 입상자 빈센트 옹과 함께하는 무대, 내년 2월 3일 바르샤바필과 함께 쇼팽 콩쿠르 1~6위 입상자 출연하는 ‘쇼팽 위너스 콘서트’에 출연할 예정이다.
그는 “한국에는 2016년 조성진과 함께 쇼팽 위너스 콘서트의 일환으로 처음 온 이후 2018년 리즈 콩쿠르 우승자로서도 여러 차례 왔다”면서 “한국 관객은 연주자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최근 클래식계에서 두드러진 중국계 연주자들의 약진에 대해 루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왔다”며 “아시아는 교육에 있어 부모의 관심과 헌신이 크다. 어릴 때부터 진지하게 음악을 배우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상위권 인재가 나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