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28개항 평화구상의 골자는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지역(도네츠크·루한스크)을 포기하고 미국은 우크라이나 안보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크라이나가 영토 포기를 받아들일지, 안보 보장이 어느 수위로 이뤄질지가 핵심 쟁점이다. 측근 부패 스캔들로 입지가 좁아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포기를 쉽게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측 평화안의 핵심은 크림반도와 도네츠크, 루한스크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꾸준히 요구해온 제안이라는 점에서 해당 내용은 사실상 러시아의 승리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는 아직 도네츠크의 약 25%를 통제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가 많은 피를 흘리며 지킨 영토를 포기하는 건 매우 큰 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핵심 방어선인 도네츠크 서부 ‘요새 벨트’를 포기해야 하며 시민 수만명이 강제 이주당할 수도 있다.
평화안에는 우크라이나가 포기한 일부 도네츠크 지역은 비무장 완충지대가 되며 러시아군은 진입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향후 완충지대를 침범하면 우크라이나 중부가 전쟁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다. 미국은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안전 보장’을 평화안에 명시했다. 하지만 안전 보장의 구체적 내용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오히려 평화안에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영국·프랑스·독일은 미국의 평화안을 수정한 ‘반대 제안’을 마련했다. 가장 큰 차이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포기 없이 ‘영토 협상은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시작한다’고 정했다는 점이다. 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는 ‘모든 회원국의 만장일치에 달려 있다’며 여지를 열어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내부 반발이 큰 미국 안을 수용할 경우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드미트로 쿨레바 전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국민이 원하지 않는데 단지 전쟁을 중단하려고 극도로 고통스러운 계획에 동의할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젤렌스키가 도네츠크 철수 명령을 내리면 정부와 군 사이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전망한다. 유럽 군사 전문가 프란츠-스테판 가디는 “우크라이나군은 지쳤지만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