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흔적이 치유를 이끈다. 몸은 상처를 잊지 않는다. 칼에 베인 자국, 부러졌던 뼈, 아팠던 근육…. 시간이 지나면 통증은 사라지지만 세포 속 어딘가에는 그 당시의 흔적이 남는다. 놀랍게도 이 흔적은 단순한 상처의 잔재가 아니라 다음번 상처의 치유를 이끄는 기억의 씨앗이 된다.
피부에 생긴 상처 자리를 가만히 만져보라. 어느새 새 살이 돋아난 상처 위에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다. 표면은 매끄러워졌지만, 그 아래서는 수많은 세포가 다시 태어나며 서로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마치 이전의 설계했던 건물 곳곳을 기억하는 건축가처럼 말이다. 세포는 자신이 있던 자리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이 질서 속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세포는 단순히 생물학적 단위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학습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가 최근 늘고 있다. 줄기세포는 한 번 손상을 겪은 조직을 회복시킨 뒤 이 경험을 유전자의 미세한 변화 속에 남긴다. 이렇게 생긴 후성유전적 흔적(epigenetic mark)은 다음번 손상 때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반응이 나오도록 한다.
2018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셀 바이올로지’(Nature Cell Biology)에 실린 인도 출신 과학자 슈루티 나익의 연구팀 논문은 피부의 줄기세포가 상처를 한 번 겪은 뒤 염증과 재생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염증 기억(inflammatory memory)’ 형태로 저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 번 상처를 치유한 세포는 같은 부위가 다시 손상될 때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고, 치유 속도 또한 빠르게 나타났다. 세포가 “지난번엔 이렇게 회복했지”하며 학습한 결과를 실행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 안에 숨겨진 놀라운 복구의 언어다.
줄기세포의 기억은 과학 현상을 넘어 인간의 삶과 닮은 면이 있다. 세포는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적을 남겨 다음에 더 단단히 일어서기 위한 준비로 삼는다. 2021년 국제학술지 ‘셀 스템 셀’(Cell Stem Cell)에 발표된 연구에서도 근육 줄기세포가 손상 이후 크로마틴(유전자 조절 구조)의 일부를 바꿔 ‘기억된 반응 경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다시 자극을 받으면 이 경로가 즉각 작동해 손상 부위의 회복을 도왔다. 세포는 상처를 통해 배우고, 그 배움으로 치유의 능력을 확장해간다. 회복의 과정을 넘어 생명이 스스로 자신을 가르치는 방식이다.
우리의 면역계도 마찬가지다. 기억 T세포와 B세포는 과거 감염의 경험을 저장하고, 다시 같은 병원체가 들어오면 즉시 대응한다. 줄기세포의 기억 또한 이와 비슷하다. 그 기억이 몸 곳곳의 회복 반응을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재생의학은 그저 세포를 새로 심는 기술이 아닌, 몸의 기억을 회복시키는 과학이라고 불린다. 치유란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잊지 않고 다시 반응할 수 있는 몸의 능력을 되살리는 일이다.
때로는 상처가 전보다 더 강한 살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부위의 피부가 약간 두꺼워지고 근육이 단단해진다. 통증이 느껴지던 자리엔 회복의 흔적이 남는다. 세포는 이 과정에서 “부서짐이 있어야 새로움이 온다”는 걸 배운다. 우리 역시 삶의 상처가 났을 때 이 사실을 몸소 체험하지 않던가.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 흔적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다시 살아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줄기세포가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며 새 살을 돋게 하듯, 우리의 몸도 마음도 기억된 고통 속에서 다시 제 길을 찾아간다. 줄기세포가 삶과 신앙에 주는 교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잊지 않으시고, 그 흔적 속에서 새 일을 시작하신다.”
선한목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