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묘령의 대학원생 이야기

입력 2025-11-26 00:30

조정실에 묘령의 S대 대학원생이 입장했다. 얼굴도 청순하고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것 같다. 준비서면도 본인이 직접 썼다고 한다. 웬만한 변호사 뺨은 찰싹 때릴 정도로 잘 썼다. 아니, 본인이 직접 써서 그런지 웬만한 변호사가 쓴 것보다 더 진정성이 느껴진다. “현명하신 조정위원님이 조정으로 원만하게 잘 마무리해주기를 바란다”고 간절하게 호소하니, 막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꼭 조정으로 ‘현명하게’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았다.

뒤이어 상대방 변호사도 입장했다. 법무법인에 막 입사한 신입 변호사였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참한 처자를 보더니,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주 열심히 공격적으로 소장을 써서 보낸 걸 살짝 후회하는 것도 같다. 선남선녀를 앞두고 조정을 진행하려니, 묘하게 소개팅을 주선하는 사람의 심정이 됐다.

이 사건은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하는 무인 가맹점의 가맹본부가 가맹점주를 상대로 경업금지위반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이 묘령의 아가씨는 공부를 하면서 무인 가맹점까지 운영하는 재테크에도 능한 보기 드문 청년이었던 것이다. 무인 가맹점을 운영하다가 생각보다 장사가 잘 안되자, 가맹본부에는 폐업한다고 말하고는 다른 프랜차이즈 업체로 갈아탄 것이 화근이 됐다.

가맹본부는 경업금지위반, 비밀유지의무위반, 브랜드가치훼손 등으로 수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가맹점주인 학생은 몰라서 그랬던 것이라 죄송하긴 하지만, 만약 가맹계약을 유지했다면 주었을 몇백만 원의 돈만 물어주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학생이라 돈도 없단다. 하지만 상대방 변호사는 이 학생의 부모가 사업을 하고 있어 집안에 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반박한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며, 경제관념도 있는 데다 집안까지 부유한 아가씨를 소개팅 상대방이 아닌 소송 상대방으로 만나다니, 이 변호사도 안타깝다.

아무튼 원고와 피고가 생각하는 금액 차가 많으니 혹시 다른 방법으로 간극을 좁힐 수는 없을지 머리를 굴려봤다. 가맹본부가 유독 다른 프랜차이즈로 갈아탔는데도 기존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민감해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마침 가맹점주인 학생에게 인테리어 철거를 요구하는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조정문에 인테리어 철거 내용을 넣으려면 철거할 대상의 사진이 필요합니다. 가맹본부 사장님께 현장 방문하셔서 꼭 철거해야 되는 인테리어 시설 사진을 찍어서 제출해 달라고 해 주세요. 그리고 원하는 내용을 포함시켜 조정하는 만큼 손해배상 금액을 좀 더 감액하면 좋을 것 같으니 이야기해봐 주세요.”

이어서 겁먹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쳐다보는 학생에게도 이야기했다. “피고도 준비할 수 있는 돈을 최대한 알아봐 주시고요. 가맹본부에서 요구하는 시설을 철거할 수 있는지, 비용이 얼마나 들지도 알아보세요.”

한 달쯤 뒤, 소개팅 애프터 아니, 속행 조정기일이 열렸다. 다행히 양측이 생각하는 금액 차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런데 새로운 난관이 발생했다. 가맹본부에서 요구한 인테리어 시설 철거비용만 몇천만 원이 든다는 것이다. 이를 어쩐다….

열심히 철거할 시설의 사진을 노려봤더니, 꼭 철거하지 않아도 천이나 가림막 같은 것으로 가리면 티가 안 날 것 같았다. 결국 인테리어 시설을 철거하거나 가림막 등으로 가리고, 돈은 양측이 제시한 금액을 조정해서 1년간 분납하는 것으로 조정결정을 보냈다. 양쪽 모두 이의신청을 하지 않아 결정이 확정됐다. 자칫 큰 비용과 시간을 낭비했을 뻔한 사건을 조정으로 잘 마무리한 당사자와 변호사에게 “아주 현명하셨다”고 말하고 싶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