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금융자산 ‘부메랑’… 원화 가치,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

입력 2025-11-24 02:01
사진=이한결 기자

환율이 1470원대에서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달 원화의 실질 구매력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 구매력과 하락 폭 모두 주요국 통화 중 손꼽히게 약세가 두드러졌다. 민간이 보유한 해외 금융자산이 가파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원화 약세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서울외국환거래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지난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전 거래일보다 7.7원 오른 1475.6원에 주간 거래(오후 3시30분)를 마쳤다. 환율은 장중 한때 1476.0원을 터치하면서 연중 최고치(1487.6원)였던 지난 4월 9일 이후 약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환율은 지난 7일 1450원대를 돌파한 이후 외환 당국의 구두 개입에도 꾸준히 1460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원화 가치는 최근 급격히 떨어졌다.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지난달 말 기준 89.09(2020년=100)로 직전 9월 말보다 1.44포인트 하락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3월 말(89.29)보다 낮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인 2009년 8월 말(88.88) 이후 최저 수준이다.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한 국가의 통화 가치가 다른 무역 상대국보다 얼마나 높은지를 나타낸다. 물가 수준까지 고려한 실질적인 구매력을 보여준다. 기준연도와 비교했을 때 지수가 100 아래면 저평가됐다고 해석한다.

원화 가치 하락은 그 수준과 속도 모두 손에 꼽힌다.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BIS에서 집계한 64개국 중 일본(70.41)과 중국(87.94)에 이어 세 번째로 낮다. 지난 한 달간 하락 폭도 뉴질랜드(-1.54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원화 가치 하락 배경엔 민간의 해외 금융자산 확대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 컸다. 한은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 제외 순대외금융자산은 지난 3분기 말 기준 6342억 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국가의 대외지급 능력을 나타내는 순대외금융자산(1조562억 달러)에서 중앙은행·정부의 외환보유액(4220억 달러)을 뺀 액수다. 공공부문 비준비자산이 일부 있지만 대부분 서학개미·수출기업 등 민간이 보유한 해외 금융자산이다.


해당 금액 증가세는 외환보유액보다 훨씬 가파르다.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이 플러스로 전환한 2014년 3분기 말(128억 달러)만 해도 외환보유액을 뺀 순대외금융자산 규모는 -3516억 달러였다. 하지만 11년간 외환보유액이 3644억 달러에서 4220억 달러로 576억 달러 증가하는 사이 민간 순대외금융자산은 9858억 달러가 늘어 증가 폭이 17.1배나 컸다. 한은도 이를 주시하고 있다. 지난달 한은 금통위 의사록에서 한 금통위원은 “(외환보유액과 민간 순대외금융자산의 증가 폭 격차가) 민간의 달러 수요 급증을 시사한다”면서 “앞으로도 해외투자 및 민간의 달러 수요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국은 그간 민간의 순대외금융자산 확대를 긍정적으로 취급해 왔다. 외환보유액과 유사하게 ‘환율 방패’로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2022년부터 입장을 바꿔 해외 금융자산을 국내로 들여오기 위한 외화 수급 장려책을 내놓고 있다. 다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민간 순대외금융자산은 지난해 말 6864억 달러에서 지난 2분기 말 6202억 달러로 감소했지만 3분기 들어 다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민간의 해외투자 증가가 견인한 현재의 고환율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NH선물 리서치센터는 최근 발표한 외환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환율 전망치 상단을 1540원, 하단 1410원을 제시해 1400원대가 완연한 ‘뉴 노멀’로 자리 잡을 것으로 봤다. 위재현 NH선물 이코노미스트는 “주식에 과도하게 쏠린 해외투자의 구조적 문제와 대미 투자 합의로 인한 수출업체들의 더딘 환전 수요가 모두 환율 추가 상승을 부추기는 재료”라고 설명했다. 벌어진 한·미 금리 격차도 고환율 우려를 키운다. 이민혁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12월 미국 기준금리 동결 시) 단기금리 상승과 함께 달러도 강세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이의재 장은현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