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제안한 평화구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다시 한 번 중대 분수령을 맞고 있다. 미국은 28개 조항으로 구성된 평화구상 초안을 마련해 오는 27일(현지시간)까지 수용하라고 양국에 촉구했는데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 많다. 평화구상 수정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크라이나 측과 회담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평화구상과 관련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최종 제안은 아니다”며 수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면서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는 “그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계속 싸우면 된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트럼프는 “우리는 평화를 이루고 싶다. 오래전에 이뤄졌어야 한다”며 “우리는 이 전쟁을 끝내려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루비오 장관과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 댄 드리스컬 육군 장관 등 미국 대표단은 23일 제네바에서 우크라이나 협상단과 만난다. 이 자리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도 참여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공개된 평화구상이 지나치게 러시아에 유리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초안에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를 러시아에 넘겨주고 우크라니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우크라이나 군대는 현재보다 25% 감축된 60만명으로 제한되고 러시아 영토까지 도달 가능한 장거리 무기 보유도 금지된다. 모두 러시아가 원하는 것들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평화안 28개 조항 중 상당수는 마치 크렘린궁이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극단적 요구를 거의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날 칼럼에서 트럼프가 그토록 갈망해오던 노벨평화상이 아닌 동맹을 독재자에게 팔아넘긴 대가로 역사가 주는 ‘네빌 체임벌린 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에 굴복했던 영국의 전 총리다.
공화당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공화당 소속 로저 위커 상원 군사위원장은 21일 성명에서 “평화구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인 전쟁 범죄자 중 한 명에게 영토를 내주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점점 궁지에 몰리는 모습이다. 그는 21일 대국민 연설에서 “지금은 우리 역사상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라며 “존엄성을 잃거나, 핵심 동맹국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최근 측근들이 연루된 대형 비리 스캔들로 정치적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