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하리만치 세밀한 묘사… 행렬도 웅장함·생동감 살려”

입력 2025-11-23 18:46
국민일보 아르브뤼미술상 공모가 어느덧 4회째를 맞이했습니다. 이건용 작가의 후원으로 가능해진 이 미술상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신경다양성 예술 창작자를 발굴하고 이들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창작자들이 이 상을 통해 발굴돼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제1회 대상 수상자인 김경두 작가는 최근 첫 개인전을 열며 본격적인 예술가로 발돋움 중입니다. 이 상으로 등단한 이들 중에는 여러 전시에 초청받고,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거나 많은 팬을 확보한 작가들도 생겼습니다. 이는 아르브뤼미술상이 신경다양성 당사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라는 관점보다 작품의 예술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해온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올해에도 1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공모에 참여했습니다. 심사는 출품작과 참고작을 함께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한 작품만으로는 작가의 작업 방식과 관점, 개성적 스타일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성 작가의 스타일을 모방하느라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과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은 제외했습니다.

대상 심규철 ‘고구려의 행군’ ( 2024, 종이에 펜, 56x76㎝)

대상 수상작인 심규철의 ‘고구려의 행군’은 1차 심사 때부터 유일하게 심사위원 전원의 찬성을 얻은 작품입니다. 현재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3호분’의 행렬도를 모티브로 그린 그림입니다. 작가는 4폭을 연결해 길이 3m가 넘는 긴 행렬도 중 1폭을 출품했습니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웹툰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고구려 자료를 찾다 이 벽화를 접하게 됐다고 합니다. 행렬도에 등장하는 말과 수레, 투석기는 물론 수십 명의 호위무사와 시종, 악사들을 펜으로 집요하리만치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지독하게 몰두하며 군인 한 명 한 명의 무구와 표정들을 그려 넣었을 작가의 집중력이 행렬도의 웅장함과 생동감을 살려냅니다.

최우수상 정장우 ‘흔들림 속에 꼿꼿함’(2025, 캔버스에 아크릴, 116.8×91㎝)

최우수상을 받은 정장우의 ‘흔들림 속에 꼿꼿함’은 무엇보다 역동적인 리듬과 충돌하는 색채 감각이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인물은 어딘가에 앉아 편하게 머리를 괴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고꾸라진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뭉크의 절규하는 인물의 표정이 옆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인물은 꽤 큰 충격으로 흔들림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꼿꼿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같습니다. 언뜻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풀어나가는 유머 감각이 굵고 거친 선과 그림 곳곳에 삽입된 글자, 높은 채도의 색과 보색 대비, 덧칠과 긁힘의 회화적 기법과 세련되게 결합해 있습니다.

우수상 강원진 ‘여성시대(女盛時代)Ⅱ-버스정류장’(2025, 캔버스에 아크릴, 혼합재료, 91×116.8㎝)

우수상을 받은 강원진의 ‘여성(女盛)시대 II 버스정류장’은 이야기가 풍부한 작품입니다. 정류장마다 정차하는 버스의 단속적인 운동 감각이 차창 밖 행인들 모습과 절묘하게 결합돼 있는 가운데 비슷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의 두 여성이 블랙카드를 들고 서 있습니다. 작가는 평소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몰라 이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버스를 타고 오가며 발견한 수많은 금지어와 지시어들을 그림 속에 깨알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우회전시 끼어들지 마세요’에서 ‘정수기에 손을 씻지 마세요’, ‘물을 붓지 말고 바로 드세요’, ‘숨어있지 마세요’ 등의 문구가 두 대의 버스와 버스 노선도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모래를 섞은 아크릴 물감의 두터운 질감과 가벼운 붓 흔적의 대비가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줍니다.

미술만큼 작가의 열정과 에너지가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예술은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10편의 장려상 수상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통해 세상을 향하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길 기대합니다.

심사위원장 김남시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