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능력시험을 중심으로 한 현행 대학 입시 제도는 수험생을 불확실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도록 설계돼 있다. 수험생이 아닌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대학들의 편의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국민일보는 3회에 걸쳐 수능 등 대입 제도를 둘러싼 행정편의주의와 이로 인해 점점 커져가는 사교육의 폐해를 짚어본다.
경기도에 사는 고3 수험생 A양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틀 뒤인 지난 15일 서울의 한 여대에 수시 논술을 보러 가는 차 안에서 큰 심적 갈등을 겪었다. 논술 시험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장에 갈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다 잠도 설친 상태였다.
A양은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사설 입시 컨설턴트와 전화 통화를 한 뒤 부모님에게 차를 돌려 달라고 했다. A양은 수능 가채점에서 국어·수학·탐구는 2등급으로 평소보다 잘 나왔지만 영어가 69점 4등급으로 저조했다. 수시 원서를 넣은 대학보다 더 좋은 곳을 정시로 갈 수 있는지 판단이 중요했다. ‘수시 납치’란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다.
수시 합격 통보를 받으면 정시 지원 기회는 사라지기 때문에 정시에서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으면 논술을 보러 가면 안 된다. 하지만 ‘영어 성적이 애매하니 일단 논술 보라’와 ‘정시에서 더 좋은 대학 가능하다’ 등 사교육 컨설팅 결과는 엇갈렸다. 인생을 바꿀 판단에 몰렸지만 A양에게 주어진 시간은 수능 다음날인 14일 단 하루였다.
22일 교육계와 입시 전문가에 따르면 수시와 정시로 이원화된 현행 대입은 수험생을 불확실성으로 밀어넣고 학부모에게 사교육 컨설팅 부담을 지우고 있다. 수험생은 자신이 수능 점수를 정확히 모른 채 ‘깜깜이’ 지원을 해야 하는 제도는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수능 뒤 수험생들은 수험표 뒷면에 적어 나온 답으로 가채점을 한다. 가채점으로 나오는 점수는 예상 원점수다. 하지만 원점수는 대입에서 활용되지 않는다.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 같은 서열을 보여주는 점수로 환산해야 한다.
원점수를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로 바꾸는 일은 ‘추정’의 영역이다. 수능 응시자의 30%에 달하는 N수생 등 다양한 변수가 작동한다. N수생 응시 규모와 학력 수준은 교육 당국조차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수험생이 수능 이후 다음 스텝을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를 안다는 전제 아래에 제도를 설계했다. 일단 등급으로 수시 수능 최저학력기준(최저기준) 충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충족을 못했다면 대학별고사에서 힘을 뺄 이유가 없다. 더 어려운 일은 정시 합격 가능 대학을 추리는 일이다.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마다 천차만별인 수능 점수 반영 방식과 대조해야 한다. 이 과정이 정확해야 수시 납치를 당하고 땅을 치지 않을 수 있다.
정시 모집인원은 수시가 끝난 뒤에야 확정된다. 수시에서 정시로 이월하는 인원이 매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수 대학이 탐구 영역 점수에 적용하는 변환표준점수(변표)는 수능 성적 발표 이후 나온다. 올해같이 ‘사탐런’(사회탐구 쏠림 현상)이 극심하면 변표는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수능 이틀 뒤 오전부터 대학별고사가 이어지므로 수험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다. 수능 성적표는 이런 불확실성이 휩쓸고 지나간 12월 초에야 배포된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