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자산이나 매출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도 많아지는 ‘기업 규모별 차등규제’를 시행 중인 국가는 주요국에서 한국이 사실상 유일하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과거 고도 성장기 때는 소수 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 억제 차원에서 규모별 차등규제 필요성이 있었지만, 한국 기업이 세계와 경쟁하는 오늘날에는 이런 규제가 오히려 기업의 성장 동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과 함께 관련 법규 체계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김영주 부산대 무역학부 교수팀에 의뢰해 작성한 ‘주요국의 기업 규모별 규제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23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기업의 자산이나 매출 규모에 따라 규제를 누적·강화하는 제도를 두지 않고 있다. 대신 상장 여부 등 기업의 법적 형태나 독과점 등의 행위에 대해서만 규제를 하는 방식을 운영 중이다.
이와 달리 한국은 상법 자본시장법 공정거래법 외부감사법 등 주요 경제법 전반에서 자산총액, 매출액, 종업원 수 등 정량적 기준을 중심으로 규제를 설계하고, 기업이 성장할수록 새로운 의무를 단계적으로 누적하는 구조다. 보고서는 이를 ‘성장 페널티(불이익) 구조’라고 지칭하면서 “성장할수록 규제가 늘어난다면 기업의 성장 유인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팀이 국내 법제를 분석한 결과 기업의 자산총액이 5조원을 넘기는 순간 128개였던 규제가 329개로 늘어난다. 여기에 자산 총액이 국내총생산(GDP)의 0.5%를 돌파하면 14개가 더해져 무려 12개 법률에 의거한 343개의 계단식 규제를 적용받게 된다.
영미권 국가들은 기업 규제를 ‘덩치’에 따라 세분화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연방 차원의 회사법 없이 주(州)별로 회사법이 운용된다. 델라웨어주나 뉴욕주 회사법에서 공개회사와 폐쇄회사를 나눠 별도 규제를 취하고는 있지만, 공개회사를 규모별로 나눠 차등 규제하지는 않는다. 김 교수는 “영미권은 오로지 상장 여부나 독과점 행위 여부를 기준으로 규제할 뿐 (한국처럼) 규제 목적으로 기업을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으로 나누거나 대기업을 다시 규모별로 나눠 누적 규제를 부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일은 상법에서 자본회사를 소·중·대규모로 구분하지만, 이는 재무제표 작성·공시·감사 등 회계 목적에 한정된 절차적 기준에 불과하다. 일본도 자본금 5억엔 이상 혹은 부채 200억엔 이상인 회사를 ‘대회사’로 법률상 정의하고 있지만, 대회사를 규모별로 차등 규제하지는 않는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이종명 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시총 100대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이 50%를 넘을 정도로 개방경제로 전환된 상황에서 기업 규모별 규제는 우리 스스로 발목을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의는 기업 규모 대신 법적 지위나 행위 중심의 규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 방안도 조만간 마련해 정부와 정치권에 건의한다는 계획이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