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도 부패 반대 시위
나선 우크라 시민… 법·원칙
무시해선 국민적 지지 없다
나선 우크라 시민… 법·원칙
무시해선 국민적 지지 없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 7월 국가반부패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에 대한 정부 통제 강화 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2022년 2월 러시아 전쟁이 터진 후 발생한 첫 반정부 시위였다. 시위대 수천명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을 구실로 수사기관 독립성을 훼손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대통령이 아닌 수사기관에 힘을 실어주려 한 이유는 뭘까. NABU와 SAPO는 과거 친러시아 성향 정권의 부정부패에 분노해 일어난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만들어진 독립 반부패기관이다. 젤렌스키는 이 기관들을 검찰총장 감독 아래 두는 법안을 추진하다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시민사회에선 젤렌스키가 정부 고위급 부패 수사를 막으려 이런 시도를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NABU 등은 최근 15개월간 젤렌스키의 측근들을 겨냥한 수사를 진행했다. 지난 1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마치 넷플릭스가 드라마 예고편을 방영하듯 수사 상황을 공개했다. NABU는 달러와 우크라이나 화폐가 가득 담긴 가방 사진과 부패 사건 당사자들의 대화 녹음 영상을 게시했다. NABU는 이 수사를 ‘마이다스 작전’으로 명명했고 1000시간가량의 녹음 파일이 확보됐다고 밝혔다.
부패 사건의 골자는 우크라이나 국영 에너지 기업 에네르고아톰 간부들이 정부 계약업체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세탁된 뒷돈 규모는 1억 달러(1400억원)로 추산된다. NABU는 과거 젤렌스키의 동업자였던 측근 티무르 민디치가 범행을 주도했고 전현직 에너지장관들도 관여한 것으로 의심한다. 젤렌스키는 민디치의 자산 동결 등 제재를 발표했지만 시민사회 반발은 이어지고 있다.
NABU의 수사는 순탄치만은 않은 상황이다. 젤렌스키는 NABU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법안은 철회했다. 하지만 다수의 내부 고발자들이 협조를 멈춘 상황이라고 SAPO 소속 검사는 밝혔다. NABU 소속 수사관은 지난 7월 러시아 측에 산업용 대마 판매를 중개한 혐의로 우크라이나 보안국(SSU)에 체포됐는데 사실관계가 석연치 않은 보복성 수사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서방 진영에선 우려가 터져 나왔다. 유럽연합(EU)의 한 관계자는 “역겨운 부패”라며 “EU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보수 논평가 스티브 코르테스는 칼럼에서 “젤렌스키 정권은 투명한 민주 정부가 아닌 범죄 카르텔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전쟁 후 이뤄질 재건 과정은 부패 척결이라는 대전환 없이 이뤄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시민사회는 이번 기회에 권력층 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수사기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키이우국제사회학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시민 56%는 우크라이나에서 반부패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했고, 90%는 권력은 비판받을 수 있으며 비판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전쟁 중에도 권력의 투명성을 위한 노력과 부패 수사는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례는 결국 수사기관이 정권이나 권력 핵심을 겨냥한 수사를 덮지 않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해야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패 범죄에 대한 법 적용이 당사자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에선 전쟁은 고사하고 국가를 지탱할 최소한의 신뢰조차 확보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검찰은 전 정부에선 대통령 부인 수사를 뭉갰다는 지적을 받더니 현 정부에선 대장동 사건 관계자들 재판을 항소조차 하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다. 수사기관의 권한과 동력은 결코 정권과의 거래나 타협에서 나올 수 없다. 그렇게 권한을 얻어낸들 국민이 신뢰할 리 만무하다. 부패 범죄를 법과 원칙대로 처리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인식 아래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어떤 수사기관이든 국민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나성원 국제부 차장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