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학습
독자 지능 아닌 인간 지능의 확장
인간은 여전히 판을 짜는 책임자
파트너인 AI 활용하는 전략 필요
이제 도입 속도 아닌 협업이 핵심
독자 지능 아닌 인간 지능의 확장
인간은 여전히 판을 짜는 책임자
파트너인 AI 활용하는 전략 필요
이제 도입 속도 아닌 협업이 핵심
“AI의 지능이 인간을 넘어서는 날이 온다”는 레이 커즈와일의 예견은 과연 적중할까. ‘특이점(singularity)’은 기계 지능이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순간을 뜻한다. 물론 뇌과학, 생명공학 등 첨단 기술이 총망라된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AI가 인간 지능을 넘어선다는 전망은 본질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AI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으로 독자적인 지능일까. AI가 보여주는 지능은 인간이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를 가공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현재의 AI는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 깨우친 천재가 아니라 인간 지식이 빚은 집단지성의 증폭기에 가깝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를 처리해 통찰을 보여주지만, 엄밀히 말해 자연발생적 지능이 아닌 정교하게 설계된 인공적 구성물일 뿐이다. 요컨대 AI는 ‘독립된 기계 지능’이라기보다 ‘인간 지능의 확장판’에 가깝다. 따라서 특이점의 실체 역시 기계의 독립적 각성이 아니라 인간 데이터와 알고리즘 조건 안에서 지능을 극적으로 증강해 주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
이제 속도가 아닌 활용이 승부처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주창한 ‘피자 두 판의 법칙’은 혁신을 위한 팀 운영의 황금률로 통한다. 한자리에서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는 적정 인원(6~10명)이 효율적인 소통과 협업에 최적이라는 이 원칙은 많은 기업의 조직 운영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방대한 데이터가 넘쳐나는 AI 시대에 지식의 총량면에서 너무 협소하지 않을까.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 인원의 제한된 경험에 의존해 아이디어를 짜내는 대신 광대한 인류 역사에서 지혜를 추출하는 ‘히스토리 스토밍’은 어떨까. 역사는 수십억 명의 경험과 지식이 누적된 거대한 집단지성 아카이브이자 데이터 창고다. 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해 통찰을 끌어내는 데는 AI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이 필수적이다. 즉 AI를 통한 히스토리 스토밍의 영역을 시공간적 미래로까지 확장하면 그 속에서 인간 집단지성의 결정체인 특이점의 비밀이 드러난다.
생성형 AI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AI는 더 이상 신기한 발명품이 아니다. 따라서 누가 더 빨리 도입했는지는 경쟁 우위가 될 수 없다. 승패는 AI를 통해 역사상 축적된 인간의 지식과 집단지성의 힘을 조직의 경영 성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분석 역시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모두 같은 챗GPT를 쓸 수 있는 시대에 단순한 도입 속도는 경쟁력이 아니며, 핵심은 ‘활용의 깊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AI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①어떤 업무를 AI에게 완전히 위임할 것인가. ②인간의 고유한 전문성과 AI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③이 협업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것인가.
AI+휴먼 협업의 4가지 유형
AI와의 협업은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런데 핵심 원리는 2가지다. 첫째, 그 일에 인간의 경험과 직관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지식이 중요한가, 아니면 데이터로 설명 가능한가. 둘째, 실수했을 때 손실은 얼마나 클 것인가.
첫째 유형(그림①)은 “AI야, 아이디어 좀 던져봐”라는 접근이다. 이는 마케팅 슬로건이나 신제품 구상처럼 실수가 있어도 리스크가 크지 않은 영역에 적합하다. AI는 수십개의 초안을 순식간에 만들고, 인간 전문가는 그중 최고를 골라 다듬는다. 이 방식의 핵심은 인간의 직관이나 경험 등 암묵적 지식과 AI의 기능이 결합한다는 점이다. AI가 창의적 촉매제로서 수십개의 초안을 순식간에 생성하면 인간 전문가는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최적의 안을 선별하고 최종 결과물을 완성한다.
둘째 유형(그림②)은 실수에 대한 위험 부담이 높은 반면 인간의 암묵적 지식이 매우 중요한 경우 선택하는 인간 우선 모델이다. 회사의 전략 수립, 직원의 징계 결정, 복잡한 법률 자문처럼 인간의 경험과 직관이 핵심이고 실수하면 안 되는 일이다. AI는 조연일 뿐이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요약해주지만 최종 결정은 반드시 사람이 내린다.
셋째 유형(그림③)은 ‘AI 전담 영역’이다. 고객 문의 자동응답, 스팸메일 자동 분류, 문서 요약, 웹로그 트래픽 요약, 환자기록 자동 업데이트처럼 데이터가 명확하고 실수해도 큰 문제가 없는 반복 업무로, 정형화된 작업이 해당한다. 여기에서 AI 시스템은 인간의 개입 없이 24시간 자율적으로 처리하며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AI가 전담해도 무방하다.
넷째 유형(그림④)은 품질 관리형으로 AI가 초안을 쓰면 인간이 검수하는 방식이다. 계약서 작성, 의료기록 요약, 소프트웨어 코딩처럼 명확한 데이터에 기반하지만 실수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인간의 검증이 필수적이다. AI가 빠른 속도로 초안을 생성하면 인간 전문가가 꼼꼼히 검토해 최종 결과물에 책임을 지는 구조다.
사람의 역할
기업이 고객 서비스부터 AI를 도입하면서 민감한 문제는 사람이 처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개입하는 구조’(HITL·Human-in-the-Loop)다. AI가 내놓은 답을 전문가가 검토하고 수정하면 AI는 그것을 학습해 점점 나아진다. 학생이 선생님의 첨삭을 받으며 실력이 느는 것과 같다. AI의 범람 속에서 시스템 성능의 지속적 향상은 인간의 직접적 개입 덕분에 이뤄진다. 인간은 데이터 검토, 오류 레이블링, 안전 피드백 제공 등 AI 시스템의 오류를 줄여나가며 신뢰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시스템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술적 장치로는 검색강화생성(RAG)과 가드레일 등도 중요하다. RAG는 AI가 답을 내놓을 때 외부 지식을 검색으로 연결해 오류를 방지하고, 가드레일은 AI가 이상한 답을 내놓지 못하게 막는 안전장치다.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AI를 가장 먼저 도입한 기업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AI의 처리 능력에 맞게 조합할 줄 아는 조직이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증강지능이자 코파일럿이다. 인간은 여전히 판을 짜는 전략가이자 비행기를 몰고 목적지를 정하는 최종 책임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를 도구로 간주하기보다 차별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지혜와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조직은 미래의 승자가 될 것이다.
여현덕 KAIST-NYU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