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호두열매 꺼내기

입력 2025-11-24 00:34

우연히 생호두 광고를 보게 됐다. 생호두 사진을 보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살던 곳 뒷산에 호두나무가 많았다. 가을이 되면 사촌 언니와 호두를 따러 갔다. 열매를 따다 물이 흐르는 냇가에 가서 청피(호두 겉껍질)를 큰 돌에 문질러 벗겼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피는 초록색인데 나중에 보면 손과 옷이 까맣게 물들었다. 물든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어떨 땐 검은 봉지에 초록색 호두를 가득 담아 뒷마당에 묻었다. 잊고 지내다가 꺼내 보면 청피가 까맣게 변해 있고, 신발로 밟아 까면 부드럽게 벗겨졌다. 그렇게 겉껍질을 벗기면 단단한 속껍질이 나왔다. 잠깐 말렸다가 망치로 살살 깨면 상앗빛 과육을 꺼낼 수 있었다. 과육의 껍질은 손으로도 잘 벗겨졌다.

커서는 그런 상앗빛 호두를 먹어본 적이 없다. 말린 갈색 호두를 먹었고, 그것에 익숙해졌고, 누군가 ‘호두’라고 하면 갈색 과육을 떠올렸다. 생호두를 주문하면서도 그때의 싱싱한 호두 맛이 날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주문한 호두가 도착했다. 호두 망치 덕분에 편하게 깔 수 있었다. 단단한 껍질을 벗기니 내가 알던, 기억 속의 상앗빛 과육이 나왔다. 과육의 껍질을 벗기고 뽀얀 알맹이를 입에 쏙 넣었다. 내가 알던 그 맛이었다.

아주 좋아하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잊어버린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과는 다르다. 무엇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고 다시 기억해 내면, 꺼내어진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고 이제는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아도 작은 호두 알갱이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때, 순식간에 펼쳐지는 생생한 풍경이 되기도 하는 것.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잠잠히 있던 것. 청설모는 단단한 호두도 쉽게 까는 호두까기 선수라고 한다. 이 계절, 청설모처럼 단단한 껍질을 깨고 싱싱한 기억을 꺼내 환하게 지내보면 어떨까.

안미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