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재수 끝에 드디어 중소기업진흥공단(중진공)의 지원을 받아냈다. 필자가 제안한 중소형 미디어업계 재직자들이 독립적으로 AI 에이전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석사 과정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저렴한 비용으로 석사를 취득할 수 있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AI미디어솔루션학과’. 미디어와 언론사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AI 도구와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지난해 고배를 마셨던 터라 이번 선정은 더 의미가 있다.
이제는 수강생 모집이 관건이다. 공단이 제시한 최소 정원을 채워야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다. 제안서를 작성할 때 흔쾌히 협약서에 사인했던 미디어사 대표들에게 수강생을 보내주십사 부탁하면 난색을 감추지 못한다. 공단이 등록금의 절반을 지원해도 나머지 절반은 이용자와 재직자가 반씩 나눠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 등록금에 비하면 적은 액수지만 수강생을 지속해서 파견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늦깎이 교수의 서툰 영업이 계속되던 어느 날, 지인을 통해 메이저 방송사와 연이 닿았다. 프로그램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도 상대도 큰 감흥은 느낄 수 없다. 대기업은 어차피 지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회사 직원이라도 보내 달라”고 웃으며 헤어졌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프로그램을 단기 집중코스로 만들 수 있을까요” 방송사 책임자의 제안이다. ‘됐다! 이거라도 우선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내 불안이 몰려왔다. 정식 개강은 내년 3월인데 손에 있는 건 제안서뿐이었다. 함께 사업 제안서를 완성했던 집필진과 교내 교육사업센터에 도움을 요청해 실습 위주로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업계에서 활동 중인 이들을 어렵사리 강사로 섭외했다. 2주간 강사들의 일정을 맞추는 일은 더 어려웠다. 강의 일정은 해체와 재조립을 반복했다. 실습에 필요한 생성형 AI 구독료만 해도 수강생 1인당 30만 원이 넘었다. 다른 비용을 이리저리 줄여서 수강생 부담을 최대한 낮췄다. 행정비를 제외하면 학교로 돌아가는 순수익은 사실상 제로였지만 정해진 기한 내에 프로그램 구성을 완성했다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영상제작, 프로듀싱, 경영지원 등 다양한 부서에서 자원하거나 차출된 40명의 직원은 2주간 매일 4시간씩 강의에 몰두했다. 이런 식의 강의가 처음인 강사진도 수강생 관심사와 지식수준에 맞춰 매일 강의안을 새로 뜯었다 붙이며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프로그램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마지막 개인 프로젝트 발표날이 됐다. 짧은 영상과 단순한 사무자동화 에이전트였지만, 결과물을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필자의 어렴풋하던 신념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코딩의 장벽은 낮아졌다. 결국 튼튼한 기본기, 축적된 현장경험과 기획력이 빛을 발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수강생 사이에서 가장 큰 호응을 받은 작품은 제작자가 아닌 한 PD의 습작 영상이었다. 카메라 운용이나 편집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오랜 연출 경험이 있었다. 주제에 맞는 적절한 화면구성, 구도와 색감, 화면의 시퀀스에서 우러나는 감정과 스토리라인에 친숙한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체화된 기본기가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훌륭한 콘텐츠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준 사례다. 에이전트 분야에서도 매번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련의 업무를 하나의 플로차트로 엮어 행정 간소화를 시도한 것들이 호응을 얻었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복잡다단하고도 파편화된 일상의 업무에 대한 이해와 그 사이의 연관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유경험자의 통찰, 그리고 산출물의 용도와 가치를 상상할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 때문이었다. 이렇듯 AI시대는 오히려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무대로의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한동안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는 말이 유행했다. 로스쿨을 포함한 소수의 전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과 계열은 한국에서 여전히 비인기 전공이다. 교육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자율전공제는 올해부터 약 20~40%의 대학 신입생들이 전공을 정하지 않고 입학해 한 해 동안의 수강경험을 토대로 전공을 정할 수 있게 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자율전공제로 입학한 학생들의 절반가량이 공대에 지원했다. 인기학과들은 넘치는 초과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강의시수와 실험공간 확대로 분주하다. 주로 인문계열에 속한 비인기 학과에서 줄어든 신입생 TO가 고스란히 그리로 흡수된 것이다. 만약 의대가 있는 학교였다면 공대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더 허탈해진다.
2020년 필자가 한국으로 오던 시기만 해도 인공지능 업계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국가 과제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의 공대 교수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연구실에서 독자 개발한 인공지능 모델의 성능을 힘줘 발표했다. 손상된 fMRI 이미지를 복원하는 모델, 구두로 전송된 수치를 텍스트로 전환해주는 모델,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모델 등 분야도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시장은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과점하는 체제로 재편됐다. 형태나 분야를 막론하고 매일 더 많은 양의 데이터가 이들의 서버로 집중되고 있으며, 이들의 인공지능 엔진은 그만큼 더 강력해지고 있다.
이처럼 기술시장은 대개 표준화로 귀결된다. VHS 비디오, 네이버와 구글, 갤럭시와 애플이 살아남은 과정이 그렇다. 시장질서의 변화는 곧 인력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 2023년 11월 메타(Meta)에서는 약 1만 1000여명의 사원을 해고했는데, 이중 약 60%가 개발자였다. 프롬프트 활용으로 최상위 개발자들의 생산성이 폭발하자 그들을 보조하던 컴퓨터 공학도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던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안정화 혹은 대중화되면 시장은 부가가치 창출로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동일한 기술이라도 사용자의 관점과 역량에 따라 거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결과물에 큰 차이가 생긴다. 이번 단기교육은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줬다. 탄탄한 기본기와 도구로서의 AI 활용 능력만 있다면 문과 전공생도, 사회과학을 공부한 현업인도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도약할 수 있다. 충분한 읽기에 기반을 둔 토론 능력, 철학적 사고, 논리적 추론, 예술사적 이해, 수학과 통계, 심리학, 일상다반사로부터 새로운 패턴이나 기회를 발견할 수 있는 상상력과 기획력을 키우는 것이 다시 학습의 중심이 돼야 한다.
강(江)의 표면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지만, 바닥의 물살은 무겁고 느리다. AI가 가져다줄 수 있는 미래는 우리의 현실 어딘가에 이미 와 있건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갈 방송사 직원들은 아마도 이런 동료들의 시선을 마주할지 모른다. “그래, 뭘 얼마나 배워 왔나 보자”, “그런다고 바뀌겠느냐” “연봉을 더 받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느냐”와 같은 핀잔과 비아냥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수의 변화는 결국 다수를 움직인다. 소수의 의견은 처음에는 다수의 무게에 눌려 무시되지만, 그들이 일관되고 타당한 주장을 이어간다면 다수에 속한 이들 중 누군가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일리 있는 소수의 의견은 그렇게 시간을 두고 상대의 내적 태도 변화를 일으키며 종국에는 다수의 설득을 가져온다. 한 줌의 모래를 조금씩, 한 곳에 집중해 흘리다 보면 어느새 익숙한 모양의 작은 언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AI가 가져올 변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인문사회의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가져다준 의외의 선물. 중요한 것은 변화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