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병원에서 요로감염 진단을 받은 A씨는 의료진에게서 “더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2년 전만 해도 퀴놀론계 항생제로 말끔히 치료되던 세균이 더 이상 약효가 들지 않을 만큼 내성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더 강한 항생제를 처방받은 A씨는 이마저도 내성이 생기면 치료 방법이 없어질지 모른다며 불안을 호소했다.
국내에 만연한 항생제 만능주의가 ‘조용한 팬데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퍼진 항생제 오남용 문제가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생제는 폐렴, 패혈증 등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한 번에 많은 항생제를 복용하거나 임의로 사용을 중단하면 오히려 살아남은 세균의 내성만 키워주는 역효과를 낸다. 초고령사회로 이미 진입한 한국은 특히 감염병에 취약한 고령층 인구에 대한 항생제 오남용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20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하루 항생제 사용량은 인구 1000명당 31.8개로, 전 세계 2위 수준이다. 1위 튀르키예(41.1개)와는 불과 10개 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사용량인 19.5개를 한참 웃도는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인 2020년 21개, 2021년 19.5개로 잠시 감소했지만 방역 정책이 해제된 2022년부터 다시 증가세다.
항생제 오남용은 잘못된 의학 지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항생제는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용도다. 감기 같은 바이러스성 감염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하지만 질병청이 이날 발표한 ‘항생제 내성 인식도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10명 중 7명(72%)이 “항생제가 감기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심지어 의사 10명 중 2명(20.8%)도 감기처럼 항생제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항생제를 처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된 이유가 환자 요구(30.4%), 상태 악화 우려(24%) 등으로 조사됐다.
국내 고령층은 항생제 오남용에 비교적 오래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항생제 사용으로 내성이 생긴 고령층이 항생제를 제때 쓰지 못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 워싱턴대 보건계량분석연구소(IHME)는 한국에서 항생제 내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2030년 한 해에만 3만2300명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신나리 질병청 항생제내성관리과 과장은 “항생제 내성은 항생제 사용량과 비례한다. 항생제를 사용하는 만큼 내성균의 위협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환자와 의사 모두 항생제 오남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송미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환자가 의사에게 항생제를 요구하거나 처방받은 항생제를 임의로 중단하는 것은 잘못된 사용법”이라며 “항생제를 남용해선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