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 대작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한국 초연

입력 2025-11-22 00:07
국립오페라단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1막부터 3막까지의 무대 디자인. 스위스 출신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가 연출을 맡아 원작의 중세 시대 바다 위 항해를 광활한 우주로의 여정으로 표현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사진)는 주세페 베르디(1813~1901)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 오페라의 최고봉이다. 베르디가 오페라의 전통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과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로 시대를 초월해 사랑을 받아왔다면, 바그너는 기존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을 없애고 ‘뮤직드라마’(악극)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며 전환점을 열었다.


바그너는 기존 오페라가 극적 완결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음악, 특히 아리아에만 치중한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음악, 문학, 연극, 미술 등이 융합된 종합예술인 뮤직드라마 형식을 창안했다. 바그너는 뮤직드라마라는 용어를 꺼렸지만, 후대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등 전반기 작품이 전통적 오페라에 속한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4부작, ‘파르지팔’ 등 중·후반기 작품은 뮤직드라마로 정의된다.

1859년 완성돼 1865년 초연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가 기존 오페라 작법을 버리고 뮤직드라마로 본격 전환한 첫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음악의 완결성을 위해 무한선율(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선율이 이어지는 것)과 유도동기(특정 인물·사건을 상징하는 음악적 동기가 계속 변주되는 것)를 처음 선보였다. ‘트리스탄 코드’라 불리는 특유의 반음계 화성이나 잇단 조 바뀜 등의 작곡기법은 20세기 무조음악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막으로 구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유럽 전설을 바탕으로 기사 트리스탄과 공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다. 마르케 왕의 조카 트리스탄은 왕비로 들일 이졸데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졸데는 과거 전쟁에서 자신의 약혼자를 죽인 트리스탄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각오로 독약을 준비한다. 하지만 시녀가 바꿔놓은 사랑의 묘약 탓에 두 사람은 지독한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이 대작이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향 공동 주최로 마침내 국내에서 초연된다. 다음 달 4~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다. 공연 시간만 약 6시간(2번의 휴식 포함)에 달하는 점을 고려해 오후 3시에 시작된다. 2012년 서울시향이 무대 장치나 의상 없이 전곡을 연주하는 콘서트 오페라 형식으로 선보인 적은 있으나 온전히 오페라 전막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국내에서는 2010년대부터 바그너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긴 공연 시간 탓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국내에서 전막 제작이 이뤄지지 않은 바그너의 작품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뿐이다.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향은 12월 4~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한국 초연을 공동주최한다.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최상호 국립오페라단장, 정재왈 서울시향 대표,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왼쪽부터). 국립오페라단 제공

지휘는 다수의 바그너 작품을 연주한 경험이 있는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맡았다. 스위스 출신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가 연출을 맡아 원작의 중세 시대 바다 위 항해를 광활한 우주로의 여정이라는 현대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주역은 바그너 오페라에 친숙한 베테랑 성악가들이 낙점됐다. 트리스탄 역에 최고의 ‘헬덴 테너’(바그너 주역을 노래하는 영웅적 테너) 로 꼽히는 스튜어트 스켈톤과 브라이언 레지스터, 이졸데 역에 ‘바그네리안(바그너 숭배자)의 성지’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무대에 11년 연속 오른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와 엘리슈카 바이소바가 더블캐스팅됐다.

최상호 국립오페라단장은 17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공연은 단순히 바그너의 작품 하나를 올리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한국 공연계가 바그너의 심오한 음악과 철학적 세계에 도전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말했다. 츠베덴 감독은 “이번 작업을 통해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향 등 참가자들 모두 성장하고 있다”면서 “다음에 이 작품을 다시 올리게 된다면 한국 성악가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