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다 아키오 일본 토요타 회장은 지난달 29일 신규 브랜드 ‘센추리’ 출범을 처음 알리는 자리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언급하며 입을 열었다. “일본인은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하던 1930년대, 할아버지 도요다 기이치로가 만들고자 한 건 ‘토요타’라는 회사가 아니라 일본의 자동차산업이었습니다.”
단순 돈벌이를 넘은 사회에 대한 사명감이 할아버지가 기업을 만들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잃어버린 30년’이란 말이 익숙해진 지금, 일본은 다소 활기를 잃은 듯합니다. 앞으로의 100년을 만들어 가는 도전, 이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건 사업뿐만 아니라 선대의 철학을 함께 계승한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대를 잇는 경영인과 임기 안에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만들어야 하는 전문 경영인은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아키오 회장의 증조할아버지 도요다 사카치는 방직기로 토요타그룹을 창업했다. 할아버지 기이치로는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다. 아키오 회장은 미래형 도시인 ‘우븐시티’를 세우고 있다. 프로젝트 이름 ‘우븐(woven)’엔 방직기로 천을 짜듯 자율주행차·로봇·인공지능(AI) 등 혁신 기술이 촘촘하게 짜인 도시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우븐시티 프로젝트를 이끄는 인물이 아키오 회장의 장남 도요다 다이스케다. 일본에선 아키오 회장이 다이스케에게 회사를 물려줄 거란 얘기가 나오는데 국민 저항감이 거의 없다고 한다. 최근 토요타 구라가이케 기념관에서 만난 본사 직원들은 가업 승계에 관한 얘기를 한국 기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했다. 100년을 만들어 가는 도전이 사명이라고 했던 아키오 회장의 말처럼 눈앞의 성과가 아닌 먼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장수 기업을 권장하는 일본 분위기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장수 기업에는 축적한 기술력과 여러 고비를 넘기며 쌓은 위기 대처 능력이 있다. 신생 기업엔 없는 소중한 경험 자산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분석해 보니 30년 넘은 기업이 10년 미만 기업보다 평균 매출 19배, 고용 인원 11배, 법인세는 32배 많았다고 한다. 한 국가에 장수 기업이 많다는 건 생존력 강한 기업 생태계가 구축됐다는 걸 의미한다. 2022년 기준 일본엔 100년 넘은 기업이 3만3079개, 미국은 1만2780개, 독일은 1만73개 있다고 한다. 한국은 10개뿐이다. 이유가 뭘까. 꽤 많은 전문가는 상속세를 원인으로 꼽는다. 성공한 기업인이 회사를 팔거나 상속세 부담이 없는 해외로 나간 사례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한국무역협회 설문에서 기업인 799명 중 42%가 상속세 때문에 매각이나 폐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토요타와 닮은 점이 많다. 정의선 회장은 정주영 창립회장, 정몽구 명예회장에 이은 3세 경영인이다. 정 회장도 기업의 헤리티지를 강조한다. 또 하나 공통점은 수소 에너지에 진심이란 점이다. 수소는 전기보다 더 환경적이고 효율적인 연료지만, 당장 수익성을 담보하지 못해 대부분의 업체는 손을 대지 못한다. 현대차그룹과 토요타는 수소 승용차를 생산하는 거의 유이한 회사다. 정 회장은 지난 9월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0년 후를 그리며 수소차를 언급했다.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합니다. 제 손녀(1살 반)가 50년 후에는 전기차는 물론 수소차를 즐기게 될 거고, 그때는 트럭이나 트램, 철도, 선박이 수소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전기차 시대보다 더 먼 미래가 수소 에너지에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한다면 둘은 가장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상 산업2부 차장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