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무기이자 위안품… 책은 전쟁의 도구였다

입력 2025-11-21 00:13
‘전쟁과 책’은 책이라는 매체가 현대 전쟁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략적 무기’로 역할을 했는지를 추적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 제작된 포스터에 ‘책은 사상의 전쟁을 위한 무기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전쟁 당시 후방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요리책과 해외 주둔 미군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왼쪽부터). 아르테 제공

‘전쟁과 책’이라는 제목만 보고 전쟁에서 책 또는 도서관이 선량한 피해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오해할 수 있는 독자를 위해 저자의 말부터 소개한다. “책이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어서 전쟁과 무관하며 오히려 전쟁의 비극적 희생물이기 쉽다는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인쇄 매체의 역사를 연구하는 저자는 전작 ‘도서관의 역사’를 통해 도서관이 단순한 지식 저장소가 아니라 문화적·정치적 공간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도서관의 역사에는 장구한 지식 축적과 함께 때로는 권력에 의한 파괴가 공존했다. 파괴의 역사에 한 부분을 담당했던 것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신간에서 피해자로서의 책이 아니라 전쟁이 어떻게 책을 이용했고, 또 책은 어떻게 전쟁에 복무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먼저 알아둘 것은 여기서 말하는 ‘책’이 단순히 책만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기 같은 사적 기록물부터 소책자와 잡지, 전단과 포스터 같은 선전물, 과학 논문, 군사 기밀 문서까지 텍스트 전반으로 ‘책’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책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사상의 무기’였다. 전쟁 중인 국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도록 해야 했다. 핵심 자원은 책과 신문, 잡지였다. 전쟁 패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승리를 확신했던 독일 나치 청소년 조직 ‘히틀러유겐트’ 소년병들은 지휘관의 끊임 없는 세뇌 교육, 또 그것을 거드는 각종 매체에 노출돼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나치의 과업에 대항하는 적을 향한 호전성을 내면화했다.

전날까지도 독일의 우방이었던 소련 침공 명령을 받은 한 소년병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쁠 수가, 오늘 아침 우리의 철천지원수 볼셰비키에 맞서서 전쟁을 시작했다. 이제야 마음이 푹 놓인다”는 대목이 나온다. 패전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던 병사들 역시 소년병들이었다. 연합군 장교 한 명은 12세 소년들이 배치된 포병부대의 저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전원 항복을 거부해서 사살했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이를 “20세기 전쟁에서 이데올로기적 세뇌가 성공을 거뒀다는 결정적이고 섬뜩한 증거”라고 말한다.

책은 군수품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책으로 상징되는 지식을 총동원했다. 과학자들은 무기 개발과 통신 체계 개선을 위해 도서관에 쌓여 있던 과학 정기간행물과 특허 기록들을 뒤졌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에 조사분석(R&A)부서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전쟁 기간 2000편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국가별 안내서와 지역별 분석서를 생산했다. 지도는 전장에서 작전 수행을 위한 필수 자원이었다. OSS에 동원된 지리학자들은 새 지도 8000장을 그리고, 정보 당국 요청에 따라 정보 지도 500만장을 배포했다. 미국이 보유한 지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900만장에 불과했지만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5억장 이상을 제작했다.

책은 위안품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책을 찾았다. 저자는 “책은 위험, 따분함, 군 생활의 혹독함과는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한 미군 병사는 “책은 하도 때가 타서 글자가 안 보일 때까지 읽혔다”면서 “그런 책 한 권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때가 되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쓰라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후방의 사람들에게도 책은 전쟁의 참화를 잊는 피난처였다. 2차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요리책이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일상의 회복을 위해 분투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이 가장 특별했던 곳은 아마도 포로수용소였을 것이다. 저자는 “전시 어디에도 포로수용소보다 책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곳은 없었다”고 말한다. 책에 인용된 한 연합군 장교는 독일 포로수용소 생활 5년 동안 35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른 장교는 “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유일하게 확실한 버팀목이었고 단 하나의 참된 즐거움이었다”고 말한다.

책은 위안품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두려움과 지루함을 잊기 위해 책을 찾았다. 저자는 “책은 위험과 따분함, 군 생활의 혹독함과는 다른 삶이 존재함을 일깨우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한 미군 병사는 “책은 하도 읽혀 글자가 안 보일 때까지 사용됐다”며 “그 책을 버려야 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쓰라렸다”고 기록했다.

후방의 사람들에게도 책은 전쟁의 참화를 잊는 피난처였다. 2차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요리책이 큰 인기를 얻었던 사실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 회복 욕망을 잘 보여준다. 특히 포로수용소에서는 책의 가치가 더욱 컸다. 저자는 “전시 어디에도 포로수용소만큼 책이 귀하게 대접받은 곳은 없었다”고 말한다. 책에 인용된 연합군 장교 한 명은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 350권을 읽었다고 했다. 또 다른 장교는 “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유일하게 확실한 버팀목이자 단 하나의 참된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전쟁은 물론 책과 도서관에 막대한 상처를 남겼다. 저자는 승전을 위해 책이 어떤 공헌을 했는지 꼼꼼히 살핀 후 책이 치른 비용도 빠뜨리지 않는다. 1·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도서관의 수백만 권이 파괴되고 약탈당하고 도난당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책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역사의 매 순간 책은 파괴되는 양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출판됐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박물관의 유물이나 미술품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지만 책은 인쇄기와 종이만 있다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얘기했듯이 “불로 책을 없앨 수는 없다.” 저자는 현대 전쟁사에 연관됐던 책의 기록을 살피면서 책과 그 속에 든 ‘생각’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책은 전쟁터로 끌려가더라도 책이 남긴 가치들은 남아서 더 나은 시절, 다툼이 완전히 박멸되지는 않더라도 우리 의식의 저 구석으로 저만치 사라졌던 그 시절을 상기시킨다.”

⊙ 세·줄·평★ ★ ★
·전쟁은 책을 필요로 했고, 책은 전쟁을 바꿨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90여컷의 도판과 꼼꼼한 설명에 정성을 느낀다
·친절한 책은 아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