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휴전이 발효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이스라엘을 찾아 전쟁의 피해자들을 만나봤다. 이들은 모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토로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지만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정파)와는 어렵다. 하마스가 그대로 있는 한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텔아비브 인질광장에서 만난 루이스 할(71)은 하마스에 인질로 끌려간 경험과 소회를 털어놨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접경 키부츠(집단농장)에 살던 그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을 때 붙잡혀 인질이 됐다. 이후 가자지구 라파의 빈집 2층에서 다른 인질들과 함께 129일간 억류됐다. 이들을 감시한 하마스 대원은 할에게 “너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잖아. 여기는 팔레스타인인데 뭐 하는 거야.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폭발음에 놀라 잠에서 깼고 이스라엘군이 구출하러 왔다는 걸 알게 됐다. 할은 “이스라엘군 무전기에서 ‘다이아몬드는 우리 손에 있다’는 말이 들렸다. 그 다이아몬드가 나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귀환한 뒤 매주 인질광장에 나온다는 그는 “트라우마는 멈추라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며 “드론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울음이 터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마 20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이 참혹한 기억 속에서 흔들릴 것”이라고 했다.
11일에는 2년 전 하마스가 급습했던 이스라엘 남부의 니르오즈 키부츠를 찾았다. 참극 당시 집을 비워 화를 피했던 주민 리타 리프시츠(61)는 “우리 키부츠 주민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친구였다”며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믿지만 그 평화는 하마스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하는 평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시아버지를 비롯해 무참히 살해된 동네 주민들과 불에 탄 집들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니르오즈 전체가 매일 아침 슬픔과 트라우마 속에서 눈을 뜬다”며 “그래도 우리는 하마스보다 강하니 다시 여기로 돌아와 살 것”이라고 강조했다.
2년 전 하마스가 들이닥쳐 살육극이 벌어진 노바 음악축제 현장에선 당시의 몇 안 되는 생존자 마잘 타자조(35)를 만났다. 그는 친구 2명과 함께 축제를 즐기러 왔는데 친구들은 모두 살해됐고 자신만 시신 틈에서 죽은 척하면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예전에는 세상이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 참사를 겪으며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했다. 학살 장면이 다 공개됐는데도 그 일을 하마스의 ‘저항’으로 미화하는 데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타자조는 “우리가 공격을 멈추면 그들은 다시 무장해서 또 올 것이다. 그들을 그대로 두면 우리에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며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가자지구가 바로 건너편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이스라엘군 관계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하마스가 휴전 합의를 어기고 옐로라인(이스라엘 철군선)을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하마스가 합의대로 무장 해제에 나설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년 만에 이곳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그 평화는 몹시 불안한 상태다.
텔아비브·니르오즈·노바=글·사진 천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