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발전과 세대 변화로 상호존중의 소통 규범 무너져
무분별하게 이어받은 정치권 자극적 메시지만 쏟아낼 뿐
논리적 설명과 토론 사라지면 공동체와 민주주의 위협받는다
무분별하게 이어받은 정치권 자극적 메시지만 쏟아낼 뿐
논리적 설명과 토론 사라지면 공동체와 민주주의 위협받는다
지역구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유권자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속 정당의 성과를 과대 포장하고 상대 정당의 정책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끊임없이 내건다.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과 과격한 문구는 지지 정당을 달리하는 유권자 간의 갈등만 심화할 뿐이다. 현수막에 새겨진 자극적인 문구로 일방적인 소통을 통해 유권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유권자와 쌍방향 소통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최근 극으로 치닫는 구성원 간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는 소통 방식과 규범의 급속한 변화일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대화는 사라지고 발화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특정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에 앞서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상호존중의 소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미국인은 ‘영어를 말할 줄 아는가(Do you speak English?)’, 즉 자신의 의견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중국인은 ‘영어로 표현된 상대의 의견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가(你听得懂英语吗)’라고 묻는다. 일본인은 ‘영어를 이해하는가(英語は分かりますか?)’, 즉 영어로 표현된 상대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묻거나 ‘영어가 가능한가(英語ができますか?)’, 즉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상대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묻는다. ‘영어를 할 줄 아는가’라고 묻는 우리의 질문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를 나눌 때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말하기’에 초점을 두는 반면 간접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듣기와 이해하기’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모바일 기기로 무장하고 디지털 공간에서 성장한 MZ세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우리 사회의 오랜 소통 규범이 도전받고 있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려는데 유관기관 MZ세대 직원으로부터 급하게 자료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받는다. 퇴근을 잠시 미룬 채 자료를 찾아 보내고 보낸 자료에 대한 수신 여부나 감사의 뜻을 담은 답신을 기대하지만 어떤 답신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한두 번 경험한 것도 아니지만 관계는 사라지고 목적만 존재하는 소통 방식이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채팅방, 기업용 메신저, SNS DM, 이메일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MZ세대는 물리적·정신적 과부하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소통을 선호한다. ‘답장에는 답장이 따라야 한다’ ‘대화는 손아랫사람의 인사로 마무리돼야 한다’ 등 기성세대의 소통 규범은 MZ세대에게 시간 낭비를 초래하는 불필요한 관행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메일과 메신저의 읽음 표시가 답신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믿고, 언어는 관계를 맺는 도구가 아닌 업무를 처리하는 도구로 여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닌, MZ세대의 생존 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소통 방식의 변화가 정치권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정치권은 대화를 통해 이견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내는 토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나 상대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보다 지지층을 향한 짧고 자극적인 메시지만 쏟아내는 장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유튜브와 같이 논리적인 토론이 아닌 짧고 자극적인 메시지의 빠른 확산을 위해 설계된 플랫폼으로 정치 공간이 이동하면서 논리적인 토론은 소멸됐다. 정치적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지지층 결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논리적인 토론은 비효율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말수는 늘어나지만 대화는 사라지고 있다. 대화는 구성원 간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신뢰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며 갈등을 완화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개인은 대화 속에서 주변의 피드백을 통해 정체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역할을 확립하게 된다. 대화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공동체를 결속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다. 조금 번거롭고 피곤하더라도 메신저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규범을 지켜내고자 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