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톱 제노사이드’(Stop Genocide·집단학살을 멈춰라)라는 구호는 간명하고 강력하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구호인데 세계 각지의 집회 현장 등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가자지구 전쟁 기간에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희생됐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또 폐허가 된 가자지구 사진을 볼 때마다 ‘저렇게까지 다 때려 부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최근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년간 이스라엘은 눈부신 군사적 우위를 보였으나 현재 휴전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고 팔레스타인과의 포괄적 합의는 요원하며 국제적 비난은 커져만 간다”면서 “이곳의 미래는 지속적 안정보다는 영원한 전쟁을 예고한다”고 전했다. 또 이스라엘 국민들 사이에서 조국의 앞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커지면서 이민이 급증한 것도 전쟁의 뼈아픈 상처라고 지적했다. 다른 것보다 ‘커져만 가는 국제적 비난’에 눈길이 간다. 지난주에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스라엘 정부 측 입장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니 그들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게 너무나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현지 언론인 벤 드로르 예미니는 “이 세상 어떤 국가도 전쟁범죄가 전혀 없는 나라는 없다”며 “이스라엘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것을 나는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범죄에 대해선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나치’ ‘제노사이드 국가’로 몰아가는 것은 사실과 다른 악마화”라고 강조했다. 제노사이드라면 희생자가 남녀노소 골고루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투 연령대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제노사이드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는 또 “세계 유력지들은 심하게 여윈 아이 사진과 함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굶겨 죽이고 있다’고 대서특필했다”며 “하지만 그건 희귀병을 앓는 아이 사진이었고, 가자지구로 들여보낸 구호물자 상당수를 하마스가 탈취해온 사실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언론 감시단체 ‘어니스트리포팅’에서 일하는 시몬 마온도 ‘가자 아이들의 굶주림은 이스라엘의 봉쇄 탓’이라는 도식은 잘못됐으며 이스라엘도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노력했다고 항변했다. 다만 국제 여론전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실패했음은 인정했다.
‘피해자성’ ‘피해자다움’을 선취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진 것이라고 본다. 전쟁은 분명히 하마스가 먼저 시작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하고 납치해갔다.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사망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급속히 늘면서 희생자 숫자의 비대칭이 커졌다. 저간의 사정이 어떠하든 숫자에서 나는 차이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가른 것이다.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피해자성은 어떻게 권력자의 무기가 되었나’라는 제목의 책이 올해 출간됐을 정도로 지금은 피해자의 위치를 점하는 게 유리한 시대다. 모두가 자신들이 제일 억울한 피해자라고 호소한다. 책의 저자 릴리 출리아라키는 그런 고통을 주장하는 사람을 안타까워하지만 말고 우리가 어째서 그 고난에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탐문해야 한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이 말하는 고난과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억울함, 둘 중 어느 쪽의 피해자성이 클까. 이스라엘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압도적 강자인 탓에 부정적인 국제 여론 지형을 단기간에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