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달랐던 단짝의 목소리, 그때 관심 갖지 못한 죄책감이…

입력 2025-11-22 03:05
짝 같은 이를 잃은 아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짝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며 이는 새로 움트는 희망의 출발점이 된다. 챗GPT

그의 이야기는 대학 시절 만난 인연으로 시작된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나 짝이 된 친구. 재수해서 나이가 한 살 더 많았던 그 친구를 “형”이라고 부르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사회성이 부족해 보였던 형은 종종 감정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해서 다른 동기들은 말 붙이기 어려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형이 싫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특이하다고 여기는 형의 모습이 그에게는 특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학교 벤치에 누워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의 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너는 왜 사니? 왜 사는지 난 모르겠다.” “형,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죽지 못해 사는 거지(웃음).” “난 ‘중고딩’ 시절에 참 힘든 일이 많았어. 그래서 지금 전공하는 상담 공부를 계속해서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멋진 꿈이네. 나는 교직을 이수하고 학생들을 살갑게 챙기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형도 나도 파이팅이다!”

1학년을 보낸 뒤 형은 휴학을 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가 군에 입대하기 한 달 전,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말고사 끝나면 학교로 놀러 갈게.” 그런데 수화기 너머 형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왠지 느낌이 싸했다.

기말고사 날, 학교에 간 그는 흠칫 놀랐다. 그를 뺀 나머지 동기들이 모두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에 오르기에 ‘무슨 일이 있구나’ 짐작만 한 채 따라나섰다. ‘형이 없네? 형 가족 조문을 가는 건가. 왜 형이 나한테 따로 연락을 안 했지?’

장례식장에 도착해 영정사진 속 형을 발견했다. 형이 그와 통화하고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형이 과거에 자해한 적도 있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다는 얘기도 들었던 그였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장례 일정을 마친 뒤 학과 교수님이 학생 3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다 그를 지목했다. “부모님께 학교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이가 평소 제일 친했으니까 먼저 얘기해 줄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같은 반 학생들이 모두 한 마디씩 전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한 마디를 남겼다. “좋은 형이었습니다.” 형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는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일상복이 전투복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마음에 평온이 찾아올 리 없었다. 군에서도 그는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형이 전화했던 날, 내가 좀 더 살갑게 대해줄 걸. 내가 좀 더 관심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렇게 소리 없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짝이 돼줬던 형처럼 그의 ‘전우조’(군에서 병사들을 2명씩 묶어 함께 생활하게 하는 제도)가 된 장병이었다. 형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느라 괴로웠던 일상은 전우조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주는 안식으로 조금씩 채워졌다. 그의 이름은 남기원. 그렇게 기원씨에게 찾아온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움트게 하는 출발점이 됐다.

남기원씨의 ‘회복 이야기’는 QR코드와 함께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심소영 한국자살유족협회 이사 감수.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