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서울 종로구 아리수 갤러리. 역동적으로 페달을 밟는 사이클 선수들의 주황빛 형상이 담긴 그림의 배경은 하얀 캔버스가 아니었다. 거친 붓질이 지나간 자리에 주기도문 글씨가 이를 지운 먹물 자국 아래 희미하게 비쳤다. 의수 화가 석창우(70) 화백이 작품을 만들려고 글을 썼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한쪽에 미뤄뒀던 종이들이었다. 보통이라면 구겨져 버려졌을 파지가 그의 쇠갈고리 끝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석 화백은 제47회 개인전이 열린 마지막 날인 이날 전시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이 작품을 자신의 인생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는 “작품이 되려다 버려질 뻔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더니, 그냥 새 종이보다 훨씬 깊은 질감이 살아났다”며 “팔을 잃고 끝난 줄 알았던 내 인생을 하나님이 다시 들어 귀하게 쓰시는 것과 똑같지 않으냐”고 말했다.
석 화백은 1984년 전기설비 점검 중 2만2900V 감전 사고로 29살 청춘에 양팔을 잃었다. 하지만 어린 아들에게 참새를 그려주다가 달란트를 발견한 그는 오랜 수련 끝에 2018년 평창 패럴림픽 폐막식 무대에서 전 세계인에게 양팔 의수로 자신 특유의 ‘수묵 크로키’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재건동산교회에 출석하는 그는 지난 3월부터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을 맡아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최근 기술이 좋아져 손가락 압력까지 조절하는 로봇 의수가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낡은 갈고리를 고집했다. 석 화백은 “손주들을 한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로봇 의수를 고민한 적은 있다”면서도 “하지만 그걸 끼면 ‘석창우의 그림’은 사라진다. 이 투박한 갈고리가 곧 나의 붓이자 손”이라고 말했다. 이어 “잃어버린 팔 대신 하나님이 내게 입력해 주신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붓끝이 머무는 소재는 사이클 등 역동적인 피사체다. 석 화백은 “몸이 정적이다 보니 마음은 늘 동적인 것을 갈망한다. 자유로운 해석을 위해 될 수 있으면 그림의 제목도 적어두지 않는다”며 “사이클 선수가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 모습을 보면 내 안의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사이클은 인생이자 신앙과도 같다”며 “넘어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석 화백은 최근 작품들에 불편함에 주저했던 색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1층 전시장은 과거 석 화백이 주로 쓰던 흑백의 묵향 대신 노랑 빨강 초록 등 원색의 동양화 물감이 화선지를 채우고 있었다. 변화의 계기는 2019년 떠난 유럽 성지순례였다. 석 화백은 “이탈리아 스펠로 지역의 꽃 축제 기간에 2층 베란다에서 광장을 내려다 봤는데, 꽉 찬 사람들의 머리가 마치 꽃송이들처럼 보였다”며 “빈틈없이 피어난 그 장면이 머릿속으로 쑥 들어와 붓을 대니 먹 대신 색이 입혀졌다”고 회상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그렸다는 작품들도 그랬다. 바이러스를 형상화했지만 칠하다 보니 기괴한 균이 아닌 꽃처럼 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바이러스를 형상화한 곳곳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그는 “작업하다 보니 우연히 색이 섞이기도 했는데, 그게 꼭 희망을 주는 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다. 자택 방 4개 중 3개가 수백 점의 작품으로 가득 찬 창고가 된 지 오래라고 한다. 그가 이토록 치열하게 그리고 또 성경을 필사하며 작품을 남기는 이유는 감사 때문이었다. 석 화백은 “팔 없이 사는 게 고통스러워 60살이면 내 인생이 끝날 줄 알았는데 환갑이 지나도 살아있더라”며 “가만 돌아보니 사지가 멀쩡했던 30년보다 팔 없이 산 30년이 더 행복했다. 그 은혜를 갚고 싶어 무작정 성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석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해 기독교 문화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연합 공간이 생긴다면 내 모든 것을 기증하고 싶다”며 “그런 공간이 만들어져서 내가 그곳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작품 활동도 같이하면서 쓰임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소망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