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운 좋게 붙은 회사를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한창 코로나19가 뉴스에 등장하던 2019년 겨울 인천공항 관제탑에서 일하게 된 ‘코로나 키즈’다. 지금도 처음 마이크를 잡은 그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경험도 없는 신입 관제사가 영어로 교신하려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말 한마디가 수백명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사실은 단 하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를 강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과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 인천공항의 하늘은 빠르게 비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인천공항을 오가던 비행편 수를 크게 줄여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평온이 오래 가리라 착각하고 있었다. 평온 속에서 방심한 틈을 타 다시 비행기가 인천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항공편이 단 몇 주 만에 하루 1000대까지 폭발적으로 회복되던 시기가 있었다. 수백명을 태운 비행기들이 경쟁하듯이 출발·도착 리스트에서 서로를 밀어 올리면 벼랑 끝으로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폭설이 쏟아지던 어느 날 동체에 쌓인 눈을 녹이기 위해 제빙장으로 진입하던 출발 항공기가 멈춰 섰다. “유도로 중심선이 보이지 않아 제빙장 진입이 어렵습니다”라는 말이 관제실에 퍼지고, 거대한 항공기가 멈춘 자리 뒤로 수많은 비행기가 쌓여갔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정지하세요(Hold position)”라는 지시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관제에 실패했다는 자책을 관제탑 안에서만 남겼다면 참 좋았을 텐데, 기어이 집까지 끌고 들어가 자신을 괴롭혔다. 조종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내뱉는 “확인해주세요(Confirm)” 하는 말이 환청으로 들렸다. 주어진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다음으로 맡을 관제 시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이 겹치면서 자존감은 침대와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더 커졌고, 회사를 떠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선배와 상담하기도 했다. 끝내 도망치는 것은 내가 찾는 해답이 아니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살아남는 것. 그때부터 나는 불안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먼저 동료 관제사의 관제를 유심히 지켜봤다. 어떤 순서로 비행기를 처리하는지, 바쁠 때는 어떻게 동선을 조율하는지 눈치껏 관찰하며 기법을 배웠다. 보고 들은 걸 활용할 생각으로 바쁜 시간대에 자처해 마이크를 잡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렇게 쌓인 경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만의 작은 관제 법칙을 만들었다. 핵심은 ‘30분 법칙’이다. 아주 바쁘고 혼란스러운 상황도 대부분은 30분 안에 지나간다. 눈앞의 혼란을 영원한 재난처럼 느끼지 않아야 한다. 안정을 찾으면 지금 내 주파수로 들려오는 교신에 집중하며 최선의 지시를 내린다. 아직 착륙하지 않은 수십대의 도착편에 지레 겁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올바른 행동이 10개의 불필요한 걱정보다 훨씬 강하다. 마지막으로는 실수를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배웠다. 잘못된 지시를 줬다면 최대한 빨리 바로잡고, 필요하다면 동료에게 상황을 공유하며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즉시 교정된 실수는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세 가지 법칙을 새기자 관제하는 시간이 한결 편해졌다. 침묵의 시간 없이 빠르게 필요한 지시를 끝내고 주파수가 조용해지면 쾌감이 들었다.
간신히 불안에서 벗어나고 나니 요즘에는 또 다른 위기가 고개를 든다. 이번에는 자만이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태도가 불안이 차지하던 자리를 대신하려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막아선다. “그 방법보다는 이게 더 낫지 않을까요”라며 조언에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낯설다. 소심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대책 없이 당당한 모습만 남았는지 놀랍기도 하다. 관제사의 자만은 방심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낀다. 관제하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훈수를 두려는 마음을 자책하기도 한다.
불안과 자만 사이 어딘가에서 줄타기하듯 관제석에 앉아 있는 요즘이다. 복잡한 상황이 닥쳤을 때 잠을 설칠 만큼 괴롭지 않은 정도의 긴장과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정도의 자신감이면 충분하다. 마음의 줄 위에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중심을 잡아본다. 끝났다고 안심할 수 없는 자리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