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않는 사랑’, 소설 속 그 은혜의 계보를 잇다

입력 2025-11-20 03:05
엔도 슈사쿠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신부가 박해의 두려움에 떠는 크리스천 모키치(츠카모토 신야)와 빗속에서 이마를 맞대고 있다. 국민일보DB

20세기 중반 전쟁의 폐허와 문명의 충돌은 신앙마저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듯했고 인간은 버려진 존재처럼 흔들렸습니다. 이 어둠의 공기 속에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사진)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실까. 믿음은 어째서 배반과 실패를 동반하는 걸까.” 이 질문은 오늘에도 유효합니다. 성공과 성취의 표면 아래 버려지고 상처 입은 이들의 신음이 여전히 들려오기 때문이지요. 엔도를 다시 읽는 일은 실패 속에서도 끝내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엔도의 문학은 한 문구로 응축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 그래서 끝까지 버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소설 ‘전쟁과 사랑, 사치코 이야기’에서 슈헤이는 시집을 펼칩니다. “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참된 사랑을 배우고 싶다. 그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 사랑이 계산을 비워낼 때 인간의 마음은 누군가의 추락을 자기 일처럼 떠안습니다.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에 오래 견딥니다. 이 무보상의 끈기가 엔도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심장부입니다.

그 심장은 ‘내가 버린 여자’에서 가장 극명하게 뜁니다. 가난한 대학생 요시오카 츠토무는 공장에서 일하는 미츠와 우연히 관계를 맺고 곧장 잊어버립니다. “마지막 전철이 지나간 밤의 플랫폼에서 빈 담뱃갑처럼 버린 여자였다.” 어느 날 귓가에 속삭임이 감깁니다. “인간은 타인의 삶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서는 스쳐 지나갈 수 없어.” 버린 자는 잊어도 버림받은 자의 시간에는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고 그 자국은 공허로 돌아와 그를 부릅니다.

미츠는 술집에서 일하며 버티다 병을 얻고 한센병 판정을 받습니다. 얼마 후 오진임을 알지만, 그녀는 사실을 알고도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갑니다. 버리지 못해서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같은 운명과 고통을 나눠요.” 미츠는 버림받은 이들과 운명을 나누는 길을 택합니다. 환자들의 찬거리를 장만하려 시장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끝내 누구도 버리지 않았지요. 그곳 수녀는 요시오카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서슴없이 말하겠습니다. 미츠와 같은 사람이라고.”

이 대목에서 엔도는 작품의 심장을 정면으로 해명합니다. 자전적 성찰록 ‘침묵의 소리’에서 그는 “‘내가 버린 여자’는 ‘내가 버린 예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미츠를 향한 시선에는 곧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는 이어 회고합니다. 일본 교회는 배교자, 말하자면 썩은 사과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순수성을 내세워 실패자를 삭제하려 한 도나투스가 아니라 회개하는 배교자까지 끌어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가 복음의 길임을 상기시키지요.

엔도는 말합니다. “인간은 도망가도 다시 돌아오는 존재입니다.” 그 돌아옴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동행입니다. 이 버리지 않는 사랑이 엔도의 전편을 관통합니다. 역자 이평춘은 이 계보를 이렇게 짚습니다. “엔도 초기 작품의 미츠라는 인물상은 ‘바보’의 가스통으로 이어지고, ‘침묵’에서 후미에(성상을 밟는 행위)를 발 앞에 둔 신부 로드리고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로 이어지며 동반자 예수에 도달한다.” 미츠의 연민은 예수의 동행으로 깊어가고 독자에게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떨림으로 다가옵니다.

엔도에게 신앙은 누군가를 짓밟고 승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럽고 초라한 자리에서 버려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를 다시 일으킨다는 체험이었지요. ‘침묵’의 배교 장면에서 침묵하던 예수께서 낮게 속삭이십니다. “밟아라. 나는 너를 위해 밟히기 위해 왔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인간은 예수를 버릴 수 있으나 예수는 인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은혜는 우리의 충성보다 그분의 집요한 사랑에서 시작되지요.

1966년 도쿄 기노쿠니야홀 강연에서 엔도는 말합니다. “어머니가 입혀준 그리스도교라는 양복을 몇 번이나 벗어버리려 했지만 벗고 나면 알몸이 되니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버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습니다. 인생도 아내도 신앙도 버리지 않습니다.” 또한 “퇴색한 것, 낡아빠진 것을 끝내 지니려면 재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는 언제나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신학자 김승철은 평합니다. “엔도의 작품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끝없는 연민으로 일관합니다. 어머니 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 떨어진 밀알이 죽음처럼 보이는 순간 새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요 12:24) 엔도는 이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스쳐 간 인연에도 흔적이 남고 하나님은 그 흔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신다고. 훗날 안온한 궤도에 오른 요시오카는 독백합니다. “나는 행복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허전함은 타인의 고통이 내 안에 남긴 하나님의 필체는 아닐는지요.

미츠는 버림받았지만, 그 누구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끝까지 지켜졌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누군가를 버리고서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도 행복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걸까요. 이 세상의 온갖 버려짐의 끝에서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버리지 않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낙과처럼 바닥에 떨어진 우리를 다시 들어 올립니다. 가을엔, 끝까지 버리지 않게 하소서.

송용원 장로회신학대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