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위로… 틈새는 답답한 삶의 숨구멍

입력 2025-11-19 00:08 수정 2025-11-19 00:08
박은선 작가가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개인전 전시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신작 조각 ‘생성-진화’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멀리 신작 회화 두 점이 보인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쪽 블루보틀 앞 정원에는 공처럼 생긴 돌이 줄무늬를 만들며 리드미컬하게 수직으로 올라가는 조각 작품이 있다.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거 같은 그 돌 조각은 공마다 가운데가 깨져 틈이 있는 게 특이하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조각가 박은선(60)의 ‘인피니티(무한 기둥)’ 연작 중 하나다. 그는 올해 5월 세계 조각의 성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개관한 데 이어 내년 10월 말에는 전남 신안 자은도에 자신의 작업 세계을 상징하는 ‘인피니티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둘 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했다.

조각과 회화의 경계가 무너진 21세기에 여전히 조각 장르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 중인 그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치유의 공간’을 연다. 국내 개인전은 2023년 이후 3년 만이다. 전시에는 특유의 돌 조각 작품과 함께 코로나 19를 거치며 탄생한 신작과 함께 처음으로 회화도 내놨다. 그를 지난 11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박은선 조각의 상징은 돌 조각에 있는 깨진 틈이다. 어떻게 탄생했나.

“1993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에트라산타로 유학을 갔다. 오로지 작업만 했기 때문에 작업장에 갇혀 살다시피 했다. 조각은 덩어리에서 형태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게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 이래 정석이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원하는 표현이 안됐다. 뭘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작품이 연상됐다. 왜냐하면 그 많은 조각가들이 지금까지 돌 가지고 별짓을 다 해왔으니까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1년 쯤 된 어느 날, 내가 살기 위해 판석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희한하게 돌이 깨지는 순간,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내가 사는 길이다 싶더라. 그렇게 깨진 판석을 맞추다 지금과 같은 작업으로 이어지게 됐다.”

-틈이 갖는 의미는.

“깨진 틈을 통해 숨통이 트이면서 치유가 일어났다. 깨졌던 것이 붙어 새 살이 돋는 것처럼 말이다. 깨진 부분이 증오라면 이 매끈한 부분은 사랑 같은 것이다. 증오와 사랑의 대비가 이 돌 조각 속에 있다. 그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색이 서로 다른 판석 두 가지를 사용해 줄무늬처럼 보이게 한다.”

-야외에 세운 조각 작품은 재질이 화강암인데 표면이 매끈하다. 우리가 아는 화강암의 이미지와 다르다. 너무 단단해 석공이 힘들게 돌을 쪼아 생긴 거칠고 투박한 표면이 우리가 갖는 화강암의 전형적 이미지다.

“화강암이라 사실 굉장히 힘들다. 정교함이 필요할 때는 (무른 성질의) 대리석을 쓰는 게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야외에는 화강암을 써야 견고하고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다. 색도 변하지 않는다. 대리석으로 야외 조각을 표현하면 색이 변한다. 이런 이유로 야외 작업에는 화강석을 쓰게 됐고, 연마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됐다. 연마를 하면 할수록 속살을 드러내는 게 재미있다.”

조명 형식의 ‘무한기둥-확산’(2025)과 ‘큐브’(2025) 설치 전경.

-이번 전시에는 전에 없던 시도가 나왔다. 당구공처럼 매끈한 둥근 줄무늬 대리석 돌이 공중에 매달려 서로 부딪히며 은은한 소리가 나는 작품도 있고, 안에 LED 조명이 들어가 따스한 불빛이 나오는 대리석 조각도 있다.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며 탄생했다. 코로나 초기 이탈리아는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유럽에서 가장 먼저 전국적인 봉쇄 조치를 시행한 나라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전국에 이동제한령이 떨어져 모두 집안에 갇혀 지냈다. 그때 돌 조각에 불빛을 넣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 형식의 ‘무한기둥-확산’(2021∼2023)과 화분 모양의 ‘무한 절제 08’(2021) 설치 전경.

-화분 모양 조각도 있다.

“코로나 때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이전까지는 내 일만 열심히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애들 키우는 건 아내가 다 했으니까. 그런데 봉쇄 조치가 길어지면서 저한테 변화가 많이 오기 시작했다. 저희 집 뒤에 정원이 있다. 봉쇄조치 3개월 동안 아이들과 나무도 심고, 꽃도 심었다. 이 작품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만든 작업이다.”

-회화는 처음 본다.

“원래 경희대에 조각이 아니라 회화로 입학했다. 미술하면 회화만 알고 지원했다가 수업하면서 조각에 매료돼 전공을 바꾼 것이다. 그동안은 조각을 통해 공간을 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갑자기 조각 작품 뒤 벽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걸 채우기 위해 회화를 시작했다.”

작가는 캔버스 앞에 자신의 돌 조각 작품을 세운다. 그러곤 돌 조각 틈 사이로 불빛을 비춘 뒤 캔버스에 비친 그림자 위에 물감을 뿌리고 또 뿌려 먹의 농담으로 캔버스에 틈을 구현한다. 이들 회화는 대표작 ‘무한기둥’을 평면화한 것으로 조각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조각가로 영원히 산다. 내년 1월 25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