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에서 수사 부담에 가장 밤잠을 설칠 검사는 제이 클레이턴 뉴욕 남부 연방지검장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내리꽂은 하명 수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연루 의혹이 최근 다시 드러나자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더 깊이 연루돼 있다며 민주당 인사들부터 수사하라고 팸 본디 법무장관에게 지시했다. 본디 장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복창’하고 곧바로 클레이턴을 수사 책임자로 지명했다.
클레이턴은 정치 수사를 주도해온 인물은 아니다. 지난 4월 지검장을 맡기 전까지 검사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는 기업 전문 변호사로 오래 활동하다 트럼프 1기 당시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지냈다. 트럼프 2기 들어 지검장에 임명됐지만 정치적 수사와는 거리를 둔 인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놓고 민주당 수사를 지시하면서 그는 시험대에 올랐다. 트럼프는 클린턴과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 민주당의 오랜 후원자인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창업자 등을 ‘표적’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들이 연루됐다는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엡스타인 파일을 파면 팔수록 트럼프의 이름만 더 나오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마음이 편할 검사는 노만석 전 검찰총장 직무대행일 것이다. 그는 대장동 개발비리 사건과 관련해 1심 항소 포기를 결정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클레이턴과 달리 그는 ‘20년 경력’의 검사다. 수사와 공소 유지로 이름을 알린 것이 아니라 그걸 포기함으로써 전국구 인사가 된 거의 유일한 검사다. 그의 항소 포기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의 천문학적인 범죄수익은 사실상 추징이 어려워졌고, 검찰 조직은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노 전 대행 본인의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는 사의 표명 뒤 기자들을 만나 “홀가분하다”고 했다.
엡스타인 사건과 대장동 사건의 공통점은 최고 권력인 현직 대통령이 연루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수사와 재판 방향에 따라 대통령을 기쁘게 할 수도, 격노케 할 수도 있는 지뢰밭 같은 사건이다. 트럼프는 대놓고 검찰에 개입하며 검찰 조직을 자신의 명령을 떠받드는 시녀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처럼 노골적으로 개입하진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항소를) 신중하게 검토하라”며 의견 제시인지, 명령인지 알 수 없는 지시를 했다. 노 전 대행은 결국 항소를 포기하며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사법적 부담을 덜어줬다.
권력의 개입, 검찰의 정치화는 늘 있던 일이다. 어느 정권에서나 최고 권력자를 기쁘게 하려고 자신이나 조직을 위험에 빠트린 검사도 항상 있었다. 권력자에게는 솜방망이, 야당 인사에겐 쇠몽둥이 수사를 하던 것이 한국 검찰의 오래된 이중 잣대였다. 하지만 수사와 기소라는 검찰의 기본 기능을 스스로 내려놓고 존재 이유마저 무너뜨린 이번 사례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클레이턴은 표적을 정해놓고 수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 전 대행은 “신중하라”는 은근한 ‘의견’을 전달받았다. 압박 강도가 덜한 데도 노 전 대행은 ‘홀가분한 길’을 택하며 항소라는 검찰의 한쪽 날개를 꺾었다. 클레이턴은 아직 길을 고르고 있다. 그의 반면교사는 노 전 대행이다. 검찰이 사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대신 권력 눈치를 보며 정무적 계산을 하면 그 끝엔 결국 불신과 혼란만 남는다는 교훈이다. K팝과 K조선 등 ‘K’가 붙은 모든 영역이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경지에 올랐지만 ‘K검찰’만은 아직도 혹시 다른 나라가 알까봐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다. 클레이턴이 한국 검찰 소식을, ‘노만석 뉴스’를 몰랐으면 좋겠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