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수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트럼프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엡스타인 논란’

입력 2025-11-19 00:35
지난달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 내셔널몰에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동상. 가까웠던 두 사람의 관계를 풍자한 조형물이다. AP연합뉴스

6년 전 죽은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이 살아 있는 최고 권력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다.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이 드러나면서 워싱턴 정가를 다시 강타한 것이다. 트럼프는 해당 파일이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과거 엡스타인 파일을 정략적으로 활용해온 행태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엡스타인 논란은 지난 12일(현지시간) 미 연방 하원 감독위원회가 전격 공개한 이메일 등 2만여통의 관련 문서로 다시 불이 붙었다. 엡스타인이 작성한 이메일에 트럼프의 이름이 여러 차례 언급됐기 때문이다. 엡스타인이 2011년 4월 공범이자 여자친구인 길레인 멕스웰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성범죄 피해 여성 중 한 명이 엡스타인의 집에서 트럼프와 몇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트럼프가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트럼프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엡스타인 이메일 2324건을 분석한 결과 1670건에서 트럼프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보도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연방 하원에선 조만간 법무부에 엡스타인 수사 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법안이 표결에 부처질 예정이다. 공화당 의원들마저 엡스타인 파일 공개에 찬성하고 있어 해당 법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수사 기록 공개를 요구해온 공화당 소속 토머스 매시 하원의원은 최근 ABC방송에 나와 공화당 의원 100명 이상이 찬성표를 던질 수 있다며 “이번 표결 기록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보다 오래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이미 하원 감독위원회에서 엡스타인 관련 자료를 공개했기 때문에 추가 자료는 무의미하다면서도 의원 요구에 따라 표결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공화당 의원 상당수가 파일 공개 찬성으로 돌아서자 트럼프도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16일 밤 트루스소셜에서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엡스타인 관련 문서를 공개하는 데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면서 “우리는 숨길 게 아무것도 없으며 이 모든 것은 공화당의 위대한 성공을 덮으려는 급진 좌파의 민주당 사기극일 뿐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이슈를 넘어설 때”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에 입장을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엡스타인 문건 공개에 반대했다. 그는 기자들로부터 엡스타인 질문을 받자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가짜 뉴스들이 자꾸 끄집어낸다”고 말했다. 질문한 기자에게는 “당신은 정말 형편없는 기자”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원 표결 판세가 문건 공개로 급격히 기울었다는 관측이 나오자 입장을 전격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문서가 공개되려면 상원에서도 법안이 통과돼야 하는데 상원 공화당은 여전히 법안 처리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엡스타인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트럼프의 일관된 입장은 “친분은 있지만 범죄는 몰랐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2008년 엡스타인이 유죄를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의 미성년자 성매매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엡스타인이 트럼프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젊은 여성 직원들을 빼 가면서 관계가 틀어졌고 2004년 이후에는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엡스타인의 이름만 나와도 ‘역린’을 건드린 듯 격노한다. 트럼프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핵심 인사인 마저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이 엡스타인 수사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하자 ‘반역자’라고 부르며 결별했다. 그린 의원을 ‘본보기’로 다른 의원들을 단속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2003년 자신이 엡스타인 생일 때 그에게 여성 나체를 그린 편지를 보냈다고 WSJ가 보도한 뒤에도 곧바로 100억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 이메일에서 본인 이름이 등장하자 팸 본디 법무장관에게 엡스타인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민주당 인사들의 유착 의혹을 조사하라고 공개 지시하기도 했다.

엡스타인 파일에 음모론을 가미해 정치적으로 활용해온 인물도 트럼프다.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 엡스타인과 가까운 민주당 좌파들과 이를 은폐하는 ‘딥스테이트’를 폭로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엡스타인의 자살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도 제기한 바 있다. 트럼프 지지층인 마가는 열광했고 엡스타인 수사 기록 등을 모두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트럼프 취임 이후 흐지부지됐다.

한동안 잠잠했던 엡스타인 파일 이슈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트럼프 2기 출범 초기 최측근이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지난 6월 정부효율부(DOGE) 수장에서 물러나며 트럼프와 정치적으로 결별했는데 돌연 “트럼프는 엡스타인 파일에 이름이 있다. 그게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은 진짜 이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본디 장관은 7월 ‘엡스타인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고 그의 죽음도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재확인했다. 하지만 여론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고 트럼프 행정부가 의혹을 감추려 한다는 반발은 커졌다.


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