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에게 빨리 치료의 기회가 열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소아희귀난치안과질환협회 이주혁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첨단 재생의료 환자 치료 기회 확대를 위한 정책·입법 과제' 토론회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망막층간 분리, 선천성 망막질환, 레베선천흑암시 등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 변이로 시력을 잃거나 안구를 적출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의 환아들에겐 유전자·세포치료제의 빠른 적용이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법 개정이나 행정력의 문제, 고비용 등 현실의 장벽으로 인해 임상 연구와 치료를 시도조차 못 하는 실정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핵심 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중대·희귀난치질환자에 대한 줄기세포, 유전자 치료 적용을 전향적으로 판단하고 실증과 임상이 빠르게 이뤄지도록 과감한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환자 중심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신속한 법제도 개선을 주문한 것이다. 토론회에서도 이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제시됐다.
환자 수요 기반 연구개발 지원 필요
17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희귀질환의 약 70%는 소아기에 발병하고 80% 정도가 유전적 원인으로 비롯된다. 승인된 치료제는 5% 미만의 질환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인 유전자를 교정·보완하는 유전자·세포치료제는 질환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유일한 대안이다. 박소라 재생의료진흥재단 원장은 최근 미국의 희귀병 아기를 살린 일명 ‘베이비 KJ 맞춤형 유전자 치료제’의 성공적 개발 사례를 예로 들며 한국에서도 희귀질환자 대상 유전자 치료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생후 10개월의 아기 KJ 멀둔은 희귀 유전질환인 CPS1 결핍증을 앓고 있었다. 소화 과정에서 단백질을 처리하지 못해 심각한 경우 뇌손상이나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미국의 대학병원과 연구자, 규제 기관(식품의약국·FDA)이 이 아기를 위한 맞춤형 유전자 치료제(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교정 기술) 개발에 기민하게 움직였다. 진단부터 치료제 설계, 전임상(동물실험), FDA 승인, 임상1상에서의 첫 투여까지 모든 과정이 6개월 만에 이뤄졌다. 박소라 원장은 “병원 중심의 플랫폼 구축과 규제 기관의 유연한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박 원장은 특히 환자 중심의 연구와 치료 체계를 지원하는 ‘공공 연구비’를 주목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산하에 NIH기금(FNIH)과 FDA, 제약사, 비영리단체 등이 공동으로 만든 민관 협력 파트너십인 ‘맞춤형 유전자 치료 컨소시엄(BGTC)’을 운영하고 있다. 희귀질환 중에서도 환자 수가 극히 적고 상업화가 어렵지만 원인 유전자가 명확한 질환에 대한 유전자 치료제 개발을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환자 수요 기반의 톱다운 방식으로 이뤄지는 연구개발 지원 체계로 2023년에 임상 진입 대상 희귀질환 8개를 선정한 바 있다. 이밖에도 환자와 가족, 의료인, 연구자, 정책 결정자가 함께 참여하는 ‘피코리(PCORI) 네트워크’, ‘한명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희귀질환자의 개별 치료 접근을 보장하는 ‘엔-로렘(n-Lorem)재단’ 등이 있다. 유럽(허라이즌 유럽)과 일본(AMED-MPS)에도 환자 수요 기반의 연구개발 지원이 제도화돼 있다.
박 원장은 “우리나라는 환자 수요를 반영한 신속한 중재, 임상 연구가 질환 맞춤형으로 가능한 공공 연구비 지원(민관 협력 기금) 체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서 “정부의 합리적 제도와 민관 협력 파트너십 기반의 ‘한국형 희귀질환 R&D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생체 내 방식’ 허용 법 개정 필요
현행 첨단재생바이오법 개정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유전자·세포치료제는 외부에서 원인 유전자를 교정한 세포를 이식하는 ‘생체 외 방식(Ex-vivo)’과 교정 유전자를 전달체(벡터)를 통해 직접 체내에 투여해 몸 안에서 교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생체 내 방식(In-vivo)’이 있다. 그런데 현재 첨단재생바이오법 상 첨단재생의료의 범위에는 ‘세포, 조직, 장기’로만 규정돼 있어 유전자를 직접 투여하는 ‘생체 내 방식’ 치료는 불가능하다. 국회에는 범위에 ‘유전 물질, 핵산 물질’을 추가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주혁 대표는 “첨단 재생의료는 희귀난치 아이들에게 사실상 마지막 희망이지만 생체 내 방식의 유전자 치료가 현행 법에는 빠져 있어 해외 승인 치료제도 국내에선 임상조차 못한다”면서 “연구개발 예산과 인·허가, 임상 지원 체계를 환자 접근성을 기준으로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정훈 서울대병원 소아안과 교수는 “유전성 망막질환은 환자마다 돌연변이가 달라 맞춤형 치료 외에는 대안이 없다”며 “전임상 플랫폼과 국산 유전자 교정 기술은 이미 확립돼 있지만 한국에서는 임상 단계로 넘어가지 못해 치료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유전자 교정 효율도 40% 이상이어서 치료제는 사실상 완성 단계에 있다. 국가가 임상 진입만 열어주면 망막층간 분리 같은 실명 유발 질환은 소아마비처럼 ‘치료할 수 있는 병’이 될 수 있다. 단 한 명의 시력을 지킬 수 있다면 제도 개선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