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정년연장, 청년실업과 함께 논의해야

입력 2025-11-18 00:35

일본에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슬픈 단어가 있다. 잃어버린 세대라는 의미로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취업 기회와 청춘을 잃어버린 청년층을 말한다.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신규 채용을 줄이자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30년이 지나 중장년이 된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청년 고용지표가 보내는 신호가 심상치 않다. 지난달 청년(15~29세) 취업자는 16만3000명이나 감소해 모든 연령대 중 가장 크게 줄었다. 고용률도 44.6%로 1년6개월 연속 하락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경제활동을 포기한 ‘쉬었음 인구’ 40만명과 실업자 20만명을 합친 60만명의 청년이 노동시장 밖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판 잃어버린 세대의 서막은 아닌지 걱정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법적 65세 정년연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노동계는 연내 입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 고령층의 경제활동 보장은 분명 필요한 과제다. 다만 미래 세대의 일자리 기회 보장 역시 동일한 무게로 다뤄져야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년연장으로 고령 근로자 1명이 늘어나면 청년 일자리는 0.4~1.5명 줄어든다. 기업의 한정된 예산 안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결과다. 특히 청년들이 선호하는 공공기관과 대기업 등 양질의 일자리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고용의 질적 하락도 우려된다.

정년연장의 혜택이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2024년 기준 60세 정년제를 운영하는 사업장은 전체의 5분의 1(21.8%)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대부분 300인 이상 대기업에 몰려 있다. 이번에 정년을 65세로 늘린다 해도 혜택은 이들 기업 근로자에게 편중될 가능성이 있다.

국가경쟁력 차원에서도 정년연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AI를 필두로 한 산업 대전환의 시대다. 청년은 중장년에 비해 AI 학습과 응용 능력이 높은데 정년연장으로 청년 고용이 위축되면 AI를 기반으로 한 기업과 산업의 생산성 향상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전자, IT, 금융, 미디어 등 변화 속도가 빠른 산업에서는 경험 많은 직원의 노하우보다 젊은 직원의 창의력과 기획력이 중시된다. 65세까지 동일 직장 근무를 보장하는 일률적 방식보다 산업 변화에 맞춘 유연한 고용 생태계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려면 조직의 민첩성과 적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기적은 베이비붐 세대의 헌신 위에 이뤄졌다. 그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혜는 여전히 소중한 국가 자산이다. 고령층의 계속된 경제활동 참여가 그래서 의미가 크다. 따라서 정년연장을 세대 간 대립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청년에게는 기회를, 고령층에겐 존중을 보장하면서도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현실적 대안은 재고용 제도 활성화다. 기업과 근로자가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계속 고용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을 먼저 정착시켜야 한다. 산업·기업별로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일률적인 법적 65세 정년연장은 시장에 과도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동시에 연공서열 중심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고, 중장년층이 새로운 분야에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재교육과 전직 지원 프로그램 확충 등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세대’가 생겨나게 해서는 안 된다. 청년들이 희망을 읽고 무기력에 빠진다면 미래 대한민국의 역동성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