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중심으로 초대형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AI 인프라 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뿐 아니라 이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데이터센터와 전력·냉각·네트워크 등 인프라 확충이 필수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다. 미국은 오픈AI·메타·앤트로픽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 앞다퉈 거액을 투입하고, 중국도 전력·부지·보조금 정책을 앞세워 데이터센터 규모를 공격적으로 키우는 가운데 한국의 AI 인프라 시설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AI 인프라는 초거대 AI를 학습·운영하는 데 필요한 고성능 GPU 클러스터, 데이터센터, 전력·냉각·네트워크 등 전반적인 연산 기반 시설을 의미한다. 단순한 서버 설치뿐 아니라 대규모 전력 수급과 특수 냉각 시스템, 고속 네트워크까지 갖춰야 하는 국가 단위의 전략 기반시설이다.
투입 금액 기준으로는 미국의 오픈AI가 선두주자로 꼽힌다. 샘 알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AI 인프라 확충과 관련해 초대형 계약을 잇달아 성사시키고 있다. 지난 4일 아마존웹서비스(AWS)와 7년간 380억 달러(약 54조원) 규모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앞서 오라클과 3000억 달러(약 431조원), 마이크로소프트(MS)와 2500억 달러(약 356조원), 코어위브와 119억 달러(약 17조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이번 계약까지 약 6000억 달러(약 861조원)에 이르는 컴퓨팅 투자를 확정한 셈이다.
메타도 AI 인프라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오하이오주 뉴올버니에 내년 가동을 목표로 짓고 있는 1기가와트(GW)급 데이터센터 ‘프로메테우스’가 대표적이다. 지난 8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메타가 루이지애나주에 500억 달러(약 69조8000억원)를 들여 ‘맨해튼 크기’의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메타는 자체 AI 연구시설인 ‘슈퍼인텔리전스 랩’을 꾸리고 오픈AI 등 경쟁사에서 핵심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오픈AI 출신들이 창업한 AI 스타트업 앤트로픽도 최근 인프라 경쟁에 가세했다. 앤트로픽은 지난 12일 향후 수년에 걸쳐 미국에 500억 달러(약 73조5000원)를 들여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 클라우드 컴퓨팅 스타트업 플루이드스택과 함께 뉴욕과 텍사스 주에 새 데이터센터를 짓는 프로젝트로, 상시 인력 800명·공사 인력 2400명 채용이 예상될 만큼 초대형 규모로 알려졌다. 새 데이터센터는 앤트로픽의 연구개발(R&D)을 지원하고 기존 AI 툴에 컴퓨팅 성능과 전력을 공급할 예정이다.
앤트로픽은 이 과정에서 경쟁사들 못지않은 ‘인프라 동맹’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달 구글 클라우드 반도체 100만개에 대한 접근 권한을 확보한 데 이어, AWS를 자사 기본 클라우드 공급업체로 지정하고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다. 또 아마존에서 지금까지 80억 달러를 투자받아 인디애나주 뉴칼라일에 2.2GW 용량의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
아직 경쟁사들만큼 본격적인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는 건 인프라 경쟁에서 한 번 뒤처지면 다시 따라잡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우리는 과거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AI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며 “(이번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건립을 통해) 최전선에서 지속적인 개발을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빅테크의 AI 인프라 확충 경쟁이 전력·부지·자본을 둘러싼 국가 단위 경쟁으로 번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최근 골드만삭스는 중국 데이터센터 전력 용량이 올해 30% 증가한 30GW에 달할 전망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중국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들의 자본 지출은 올해 약 65%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국가 차원의 정책 지원도 공격적이다. 중국 정부는 전기료 감면과 보조금으로 기업의 투자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중국 내륙 지방정부는 AI 데이터센터에 산업용 전력 요금의 절반 수준을 적용하는 보조금 제도를 운영 중이다. 또 바이트댄스·알리바바·텐센트 등 주요 빅테크가 운영하는 대형 데이터센터에 대한 에너지 보조금도 확대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중국에서는 사실상 데이터센터용 전기가 무료에 가깝다”며 AI 인프라 경쟁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인프라 수준은 이들 국가와 비교하면 크게 뒤처져 있다. 17일 옥스퍼드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GPU 클러스터, 데이터센터, 전력·냉각·네트워크 등 AI 전문 인프라를 가장 많이 확보한 나라는 미국(26개)이다. 중국이 22개로 뒤를 이었고, 한국은 4개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중국과 같은 ‘규모 경쟁’으로는 승부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내년이면 미국 빅테크가 구축하는 AI 전용 데이터센터 한 곳에만 GPU 100만장이 들어갈 것”이라며 “한국은 집적화 시설을 모두 합쳐도 10만 장이 채 되지 않는다. 전력망·냉각수·부지처럼 대규모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애초에 경쟁 자체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제조 강점과 문화 콘텐츠에 AI를 결합해 스마트홈·모빌리티·로봇·가전 등의 프리미엄 시장에서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 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세종=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