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경중(安美經中).’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여년 동안 굳건히 유지된 미국과의 동맹, 그리고 2024년 기준 우리 수출의 19.5%와 수입의 22.1%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대상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조합은 최적의 방안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점차 격화된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우리에게 더는 이러한 균형이나 선별적 협력에 안주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모두 자기 주도의 국제질서를 추구하면서 진영의 벽을 쌓고 있고, 우리에게도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제 과거와 같은 ‘안미경중’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방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해법 중 ‘안미’는 변화된 환경에서도 포기하기 힘들다. 경제안보, 신흥안보 등 군사협력 위주의 틀을 벗어난 포괄적 접근이 시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안보태세의 유지·강화는 여전히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고,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효용이 검증된 한·미동맹 이상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맹도 거래의 잣대로 바라보면서 협력 이상으로 압박의 신호를 보내는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생각하면 ‘안미’가 과연 효과적인 안보 장치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 수도 있지만 미국은 우리와 가치·체제를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친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다.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 간 합의 결과를 담은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역시 더 확장된 역할과 임무 속에서 한·미동맹의 결속을 기대하게 한다.
문제는 ‘경중’에 대한 대안이다.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등 미래를 선도할 과학기술 측면에서 미국은 가장 뛰어난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 시장은 충분히 매력적이며, ‘경미’는 ‘안미’의 효과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시 풍부한 응용기술, 경제적 추격 능력, 그리고 이동통신 등 각종 분야에서 이미 선점한 주요 시장 면에서 포기하기 쉽지 않은 협력대상자다.
반면 이 둘에 대한 편중 위험성 역시 경계해야 한다. 중국의 경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주요 이견이 발생할 때마다 은근히 우리를 압박하려 한 경험이 적지 않고, 미국 역시 언제든 ‘미국 우선주의’가 발동될 수 있다는 사례를 올해의 관세협상에서 보여줬다. 강대국 간 거래가 활발해진 최근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우리가 미국과 중국 양자로부터 모두 ‘러브콜’을 받을 가능성 이상으로 양국 간 담합에 의한 동시 압력의 위험이 크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미국 및 중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시장과 투자처를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미국과 중국 외에 우리가 경제협력을 확대해야 할 대표적인 대상 지역은 우리와 체제가 유사하고, 자유무역을 지지하며, 선진적인 교역환경과 제도를 보유한 유럽연합(EU)이다. 중국, 미국에 이어 우리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이고, 미래 성장잠재력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고 있는 아세안(ASEAN) 역시 우리 경제협력 다변화의 파트너로 꼽을 수 있다. 우리가 가입을 추진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회원국에 대한 협력 역시 강화해야 한다.
강대국 간 전략경쟁과 횡행하는 일방주의, 그리고 국가 간 각자도생을 위한 이합집산이 현실화되는 격변의 시대에서 우리의 생존전략은 기존보다 넓은 시각에서 더 도전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