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스승은 어린 제자를 소개하며 “감각은 천재적인데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지훈련장에서 본 제자는 또래보다 연습량이 눈에 띄게 적었다. 하지만 프로에 데뷔한 뒤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올해 마침내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주인공은 올 시즌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제네시스 대상, 상금왕, 평균타수상, 다승왕, 골프기자단 선정 기량 발전상 등 5관왕을 차지하며 ‘태훈 천하’를 선언한 옥태훈(27·금강주택)이다.
초등학교 때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옥태훈은 5학년 때 골프에 입문했고, 초창기부터 김종필(64) 프로의 지도를 받았다. 현재는 스윙은 염동훈 프로, 퍼팅은 김 프로의 아들 규태씨에게 배우지만 쇼트게임과 멘털, 매니지먼트 등 전반은 여전히 김 프로에게 의지한다. 옥태훈에게 김 프로는 스승이자 동시에 아버지 같은 존재다.
지난 9일 시즌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 3라운드를 마친 뒤 제주 대회장을 찾은 김 프로의 품에 안겨 “감사합니다. 영원히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며 눈물을 쏟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옥태훈에게 김 프로는 초등학교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철 없던 자신을 바로 잡아 오늘이 있게 해 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옥태훈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쳐 2018년 KPGA투어에 데뷔했다. 2021년 비즈플레이 전자신문 오픈에서 단독 2위에 입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지난해 7차례 ‘톱10’에 오르며 제네시스 포인트 7위에 올랐다.
올 시즌, 그는 투어 강자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지난 6월 메이저대회인 KPGA선수권대회에서 데뷔 8년 만에 감격의 생애 첫 승을 신고했다. KPGA군산CC오픈에서 2주 연속 우승에 성공했고, 지난 10월에는 KPGA경북오픈마저 손에 넣어 시즌 3승을 완성했다.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2025 KPGA 제네시스 대상 시상식장에서 만난 옥태훈은 “1년 동안 꾸준하게 해온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잘 안 된 부분도 있었지만 6월부터 좋은 성적을 쭉 이어올 수 있었다”며 “전지훈련 때까지만 해도 공이 잘 안맞아 울기도 했는데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염 프로님의 격려가 힘이 됐다”고 돌아봤다.
그의 골프는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올 시즌 샷 데이터가 말해준다. 그는 드라이버 비거리 부문 76위(평균 283야드), 아이언 그린 적중률 19위(72.6247%)에 그쳤다. 그럼에도 평균타수 부문에서 1위(69.5797타)를 차지했다. 특정한 장점 없이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스타일이라는 평가다.
특히 퍼트와 쇼트게임이 대상 수상의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 올 시즌 온그린시 평균 퍼트수는 1.7152타로 전체 2위, 리커버리율은 9위(62.94%)였다. 비거리가 길지 않았음에도 파5홀 평균타수 1위를 기록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퍼팅 연습을 엄청 까다로운 라인과 브레이크가 많은 곳에서 한 덕분에 상상력이 풍부해졌다”며 “규태형에게 레슨을 받으며 결정력이 더 좋아졌다. 올겨울에도 퍼팅 훈련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를 ‘노력형’ 보다 ‘천재형’에 가까운 선수로 평가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손사래를 친다. 옥태훈은 “연습장 불이 꺼질 때까지 연습했던 게 여기까지 온 원동력”이라고 했다.
올해 부쩍 경기력이 오른 이유로 샷의 완성도를 꼽았다. 그는 “작년까진 드로와 페이드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올해는 자유자재로 구사가 가능해지면서 스윙에 믿음이 커졌고, 성적도 좋아졌다”고 분석했다.
경기가 잘풀리지 않을 때 다스리지 못했던 감정을 컨트롤하게 된 것도 한 몫했다. 그는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욱하거나 화도 많이 내고 표정 변화도 큰 편이었다. 올해는 그런 행동을 줄이려고 노력해 훨씬 차분해졌다”고 했다.
홀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건강 악화도 스스로를 다잡는 계기가 됐다. 대회마다 아들의 경기를 따라 다니며 힘을 불어 넣어 주던 어머니는 지난해 겨울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옥태훈은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아 다시 대회장을 나오신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18홀을 걸어 다니시는 걸 볼 수 있어서 아들로서 정말 행복하다.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옥태훈은 제네시스 대상 상금 2억원과 제네시스 차량, KPGA투어 5년 시드, DP월드투어 1년 시드,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퀄리파잉토너먼트(QT) 최종전 티켓 등 풍성한 보너스도 챙겼다.
그는 “다음 달 6일 PGA투어 큐스쿨 최종전에 응시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라며 “첫 미국 도전인 만큼 잘 준비해서 떠나겠다”고 말했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DP월드투어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그는 “DP월드투어는 1월에 남아공에서 열리는 대회부터 출전할 수 있지만 훈련이 필요해 3월 열리는 대회부터 출전할 계획”이라고 향후 일정을 밝혔다.
옥태훈은 이날이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나서였다. 그는 “아버지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옥씨 성을 가진 사람 중 첫 번째 수상이라 하늘에서 많이 좋아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진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인터뷰를 마쳤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