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편이 아닌 곁으로… 진짜 신앙의 자리

입력 2025-11-14 03:03

사람은 나와 너, 우리와 너희, 같은 편과 다른 편 등으로 편을 구분합니다.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곁으로의 삶을 지향해야 하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계가 쉽게 생깁니다. 생각이 다르면 불편하고 배경이 다르면 멀어집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 고향 출신학교를 묻는 것도 ‘이 사람이 나와 같은 편일까’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의 표현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 편 가르기가 점점 우리 신앙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내게 유익한 편에 서려는 마음이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덜 손해 보고 덜 불편한 선택을 하며, 누군가의 아픔에 조용히 눈을 돌리며 외면합니다. ‘괜히 나섰다가 오해받을까 봐’ ‘누가 대신해주겠지’라는 생각이 곁으로 다가가는 사랑의 실천을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신앙의 틀을 깨뜨리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곁으로 다가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험한 ‘피의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보고 지나쳤습니다. 율법과 체면, 종교적 의무가 사랑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나는 제사장이니까, 나는 성전 봉사자니까라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의 곁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겐 멸시받던 이방인이었지만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피 묻은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봤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곁이 되어줄 수 있을까’가 더 중요했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기꺼이 곁에 서는 헌신으로 완성됩니다.

한 교회 집사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매일 교회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노숙인을 몇 주 동안 모른 척 지나쳤지만, 어느 날 마음이 불편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그의 곁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몇 주가 지나자 노숙인이 말했습니다.

“집사님, 나는 세상에 내 곁에 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내 곁에 서줬어요. 이제는 나도 하나님을 믿어 보고 싶어요.”

복음은 이렇게 누군가의 곁에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편에서 우리를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고통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의 곁에 서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곁의 사랑’의 완성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은 편을 만들지만 교회는 곁을 세워야 합니다. 힘들고 외로운 이웃의 곁으로 다가가야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무연고자 장례를 대신 치러주고 외로운 이들의 집이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나의 곁에 서서 구원의 사랑을 완성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나의 편’을 지키는 삶에서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는 삶으로 전환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능력으로 편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죄인과 약한 자의 곁에 서시며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편의 신앙’이 아니라 ‘곁의 신앙’이 될 때 그곳에서 복음은 다시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김철우 목사 (빛내리교회)

◇빛내리교회는 전북 익산에 있으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생명 살림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