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서 도망친 재독 화가 안아준 ‘도가적 자연’

입력 2025-11-12 00:10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전시 중인 노은님의 작품에선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도가 사상이 엿보인다. ‘큰 물고기 하나’(1984, 한지에 혼합재료, 286×281㎝). 갤러리 제공

물고기 같기도 하고 나뭇잎 같기도 한 형체가 특이한데, 꼬리 부분도 이상하다. 분명 있어야 할 꼬리는 안 보이고, 대신 문짝을 닮은 사각형이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통로처럼 여겨지는 이 기이한 그림은 담백한 흑백 톤으로 돼 있다.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꾸밈이 없다. 크레용으로 그렸나 싶어 가까이 가서 보면 한지를 찢어 물고기 비늘을 표현해 동양적 질감이 묻어난다.

‘큰 물고기 식구들’(1991, 한지에 혼합재료, 275×279㎝). 갤러리 제공

재독 화가 고(故) 노은님(1946~2022) 작가의 3주기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작가가 1979년 독일 함부르크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오롯이 전업 작가로만 활동한 1980년대 열정적인 창작의 10년 궤적을 담고 있다. 당시 30~40대였던 작가의 열정은 2~3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 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을 들여다보면 ‘넘치는 파워’보다는 인간과 식물, 식물과 동물, 현실과 피안의 세계를 넘나드는 생명의 순환을 느낄 수 있다. ‘두 나무 잎사귀’는 빨간색 나뭇잎 두 개가 마치 사람처럼, 물고기처럼 누워 있다. ‘나무 가족’은 엄마와 두 아이의 몸에서 가지와 싹이 자란다. 전시 제목으로 쓰인 ‘빨간 새와 함께’는 사람에게 폭 안긴 빨간 새를 그린 것인데, 사람이 새에게 위안을 받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붓질이 느껴지는 거친 마감, 구체적 형상에서 1980년대 독일을 강타한 신표현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나무 가족’(1984, 한지에 혼합재료, 269×209㎝). 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는 그간 국내에 거의 소개가 안 된 작가 인생 초반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애초 1982년 무렵 한국에 선보이려고 독일에서 건너온 작품들이었는데,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데는 사연이 있다. 그 설명을 하려면 작가의 인생 이야기로 들어가야 한다. 9남매의 셋째 딸인 노은님은 1970년 파독간호사 모집 공고를 보고 간호조무사로 독일로 갔다.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 간호사의 주선으로 병원 갤러리에서 전시를 연 것이 인생의 출구가 됐다. 함부르크예술대학 한스 티만 교수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1973년 함부르크예술대학에 입학하며 인생행로를 수정했다. 마침 초빙교수로 와 있던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당시 유럽을 오가던 원화랑 정기용 대표, 현대화랑 박명자 대표에게 소개했다. 1980년 현대화랑에서는 스승 백남준과 제자 노은님의 2인전까지 열렸다.

파독간호사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했던 노은님 작가의 생전 모습. 갤러리 제공

노은님은 1979년 독일에서 가진 첫 개인전이 성공한 뒤 1982년 본 시가 주최하는 쿤스트재단 장학금을 받았다. 사진 거장 안드레아 거스키 등이 받았던 신진 등용문이었다. 이에 당시 한국에서 노은님 개인전 유치경쟁이 일었고, 그는 대형 작품을 캔버스 채 둘둘 말아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왔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노은님미술관 권준성 관장은 “한국도 당연히 독일처럼 전시할 공간 규모가 될 줄 알았으나 원화랑은 물론이고 대부분 화랑들이 두세 평짜리 작은 화랑이라 대형 작품을 걸 수가 없었다”며 “이번에 나온 작품 대부분이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특히 1990년 함부르크예술대학 교수로 임용되기 전 온전히 작품 활동에만 몰입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 작품들은 더욱 밀도가 있다. 색상과 주제에 있어서도 그간 노은님 작품의 전형처럼 여겨지던 2000년대 이후 작품의 낙천적인 명랑성과는 차이가 있다. 작가가 2000년 결혼과 함께 태양이 환한 남부 독일로 이주한 이후 작품의 색상이 환해졌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과 달리 이번 전시가 보여주는 초기 작품들은 철학적이고 동양적인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는 생전에 도가 사상에 심취됐다. 그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도(道)의 질서를 따르며, 생명력은 자연과 우주와 조화롭게 연결될 때 극대화된다”며 ‘자연과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놀랍게도 전시장의 작품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이 함께 지구의 주인이라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닿아 있어 세월을 건너뛰며 동시대적 메시지를 던진다. 단순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물신주의에 지친 현대인들에 위로를 준다. 23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