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으로 채워진 공간에 99개 차 주전자, 그리고 수증기의 퍼포먼스… “꿈에서 본 장면을 재현한다”

입력 2025-11-12 00:12
서울 종로구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니키타 게일 개인전 전경.

전시장 안이 어둡고 텅 비어 있다. 향기만이 감돈다. 통상의 전시 문법과는 전혀 다른 설정에 당혹한 순간, 한쪽 지하 계단에서 새어나오는 형광 분홍색 불빛이 손짓하듯 이끈다. 향기의 근원이 그곳에 있다고 나직이 속삭이는 듯하다.

그곳에는 몽환적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젤리처럼 말랑한 분홍으로 채워진 지하에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고풍스러운 차 주전자가 가득 배열돼 있다.

미국 작가 니키타 게일(42)은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연 한국 첫 개인전에서 우리를 꿈의 세계로 초대한다. 제목도 ‘99개의 꿈’이다. 게일은 2006년 예일대에서 인류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2016년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에서 뉴 장르 전공으로 미술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전업 예술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2024년 휘트니비엔날레에서는 벅스바움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상은 비엔날레 초대 작가 중 단 한 명에게 주는 것으로, 예술가 경력에 전환점을 마련해줄 만큼 권위가 있다.

전시장에 놓인 차 주전자는 99개. 숫자 100에서 1이 모자란 99는 질서로 포섭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 주전자 주둥이에는 말린 쑥이 꽃꽂이처럼 길게 꽂혀 있어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심지어 몇 개 주전자는 버너 위에 올려져 있다. 끓어오르는 물이 주기적으로 수증기를 뿜는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이 향하는 정면에는 둥근 달이 떠 있다.

지난 5일 개막식에서 만난 작가는 “꿈에서 본 장면을 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쑥인지 물었더니 “LA에 거주해 한인 교포들이 운영하던 쑥탕에 익숙하다”고 답했다. 그렇게 꿈과 삶에서 가져온 재료를 가지고 작가가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수증기의 퍼포먼스이다. 통상 퍼포머로 보이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그렇게 퍼포머의 부재를 통해 현대 미술의 전통을 해체한다. ‘누가 무대 위에 서는가’라는 수직적 질문을 ‘무대 자체가 무엇인가’라는 수평적 질문으로 전환함으로써 전통적 제도와 권력을 조롱하는 효과를 낸다. 내년 1월 4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