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영글어간다. 은행나무는 땅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감나무 가지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몇 개의 감이 바람에 흔들린다. 자연은 한 해의 수고를 정직하게 열매로 보여준다. 바람과 비를 견디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시간이 모여 이룬 값진 결실이다.
사람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저마다 성실한 시간을 보낸다. 농가에서는 주렁주렁 맺힌 사과를 정성껏 따고, 사업가는 한 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쓴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이다. 가을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결실의 계절이다.
조카들이 내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12년 이어온 공부의 결실을 거둘 시간이다. “정말 떨려요.” 짧은 한마디에 그동안 노력과 고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국의 수험생도 긴장을 추스르며 각자 마음을 다잡고 있을 것이다. 어떤 부모는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고, 어느 부모는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형식은 달라도 자식을 위한 마음은 똑같다. 아이가 그동안 흘린 땀이 헛되지 않기를, 노력한 만큼 실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소망이다.
문득 좋은 결실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높은 점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 합격만이 좋은 열매일까. 자연은 다른 답을 알려주는 것 같다. 열매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응축이라는 것을. 이른 봄 차가운 바람과 한여름 뜨거운 햇살, 가을의 비바람을 견뎌야 비로소 탐스러운 열매 하나가 맺힌다. 단단한 조개 안에서 어둠과 압력의 세월을 견디고 진주 한 알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 삶도 다르지 않다. 진정한 결실은 눈앞의 결과가 아니라 목표를 이루기까지 견뎌 낸 시간의 흔적에 있다. 점수는 그저 긴 여정 속 열매의 단면일 뿐이다.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있겠지만,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무시한 조급함이다. 벼가 하룻밤 새 여물지 않듯 진정한 노력의 결실도 하루아침에 맺히지 않는다. 씨를 뿌린 만큼 거두고 땀 흘린 만큼 수확하는 일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소박한 진실이다. 때로는 수확이 기대보다 적거나 많을 때가 있지만 씨를 뿌리지 않은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중용’에서는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부터 해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것은 하찮게 여기고 멀리 있는 화려한 것만 좇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먼 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까운 곳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뿐이다. 오늘 배운 단어 하나, 오늘 내디딘 한 발은 당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먼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빨리 맺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맺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자랄 때 진정으로 맛있는 열매가 된다.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다면 열매는 작을지라도 향기가 짙고 속은 단단할 것이다.
자연이 그러하듯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누구나 저마다의 시기와 속도로 열매를 가꾼다. 누군가는 일찍 피고, 어떤 이는 늦게 익는다. 중요한 건 남들보다 빨리 거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절에 충실히 익어가는 일이다.
조카가 시험을 실수 없이 잘 치르기를,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이, 한 해 동안 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모든 이들이 크든 작든 정직한 열매를 맺기를 소망한다. 세상은 결과의 크기로 성패를 가르지만 하늘은 그 과정을 기억할 것이다.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내년의 씨앗이 돼 더 큰 희망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수밀 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