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에서 공정거래법 분야를 담당하는 A씨는 매년 제출해야 하는 기업집단 지정자료를 준비하다가 동일인(기업 총수)의 특수관계인(친족) 현황 파악에서 난항을 겪었다. 총수의 일부 친족이 연락 두절 상태이거나 개인정보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A씨는 파악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료를 작성해 제출했지만 이후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총수의 친척 중 한 사람 명의의 지분율이 빠진 사실이 밝혀졌다. A씨와 해당 기업은 허위 자료 제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유죄가 인정되면 A씨에겐 최대 징역 2년 혹은 벌금 1억5000만원이 내려질 수 있다.
재계에서는 A씨 사례처럼 총수 친족의 개인정보 제공 거부나 단순 업무 착오로 인한 자료 누락에 대해서도 실무자를 형사처벌하는 등 기업 활동을 옥죄는 형벌 조항이 지나치게 많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0일 기업 활동과 관련성 높은 21개 부처 소관 346개 법률에 대한 형벌조항을 전수조사한 결과 8403개에 달하는 행위가 징역·벌금 등 형사처벌 대상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가운데 7698개(91.6%)는 법 위반자뿐 아니라 법인도 함께 처벌되는 양벌규정이 적용되고 있다. 전체 처벌 항목의 평균 징역 기간은 4.1년, 평균 벌금액수는 6373만원으로 각각 집계됐다.
심지어 법 위반 한 번에 징역·벌금을 포함해 2개 이상의 처벌·제재를 부과할 수 있는 항목도 전체 경제형벌의 33.9%인 2850개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부품업체 대표 B씨의 경우 최근 원자재값 급등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한 업계 간담회에서 “최근 알루미늄 가격이 오르다 보니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다가 곤경에 처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들도 B씨 발언에 공감하며 단가 조정 계획을 언급했는데, B씨는 이로 인해 공정위 조사 대상이 된 것이다. 명시적인 가격 인상 합의나 계약이 없었더라도 공정거래법상 부당공동행위(담합)로 판단될 경우 B씨는 최대 징역 3년이나 벌금 2억원은 물론 매출액의 최대 20%에 달하는 과징금과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물 수 있다. 담합에 대해선 징역과 벌금 병과는 물론 과징금과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최대 4중 제재가 가능하다. 몰수·자격정지 등을 포함해 4가지 이상 다중제재를 받을 수 있는 항목만 158개에 이른다.
이런 현실은 경쟁법상 중대 위반에 한정해 형사처벌을 운용하는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는 게 한경협 주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일본 등 21개국은 카르텔이나 입찰 담합에 대해서만 형사처벌을 하고, 스페인·네덜란드 등 9개국은 형벌 규정조차 두지 않고 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중복제재와 단순 행정 의무 위반까지 형사처벌하는 현행 제도는 기업 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고 경영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이라며 “정부가 기업이 체감할 수 있도록 경제형벌을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