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1월은 ‘가족 문해력의 달’이다. 때마침 미국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로의 유고집 ‘역사는 중요하다’(History Matters)가 최근 출간돼 가족과 함께 읽을 마음으로 먼저 책장을 열었다.
‘서사 역사의 대가’로 불리는 매컬로는 2022년 별세하기까지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각각 두 차례씩 수상했다. 미국 최고 시민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비롯해 무려 56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상이나 명예가 아닌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매컬로에게 역사는 위인들의 찬란한 업적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용기와 양심으로 자기 시대의 책임을 감당한 이야기다.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위대함이 인격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 ‘존 애덤스’에서 매컬로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전까지 애덤스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그늘에 가려진 ‘괴팍한 뉴잉글랜드 사람’으로 종종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매컬로는 애덤스에게서 미국 독립혁명의 도덕적 양심을 발견했다. 그는 애덤스와 부인 애비게일이 주고받은 2000통 이상의 편지를 세밀히 분석해 한 가정의 이야기가 어떻게 한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원동력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애덤스는 생전 완공되지 못할 교회 건축을 위해 헌신한 신앙인이었다. 정직하고 거침없으며 인기보다 진리를 택한 사람이다. 제퍼슨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다”고 선언했다면, 애덤스는 “그 평등이 유지되려면 덕과 절제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보다 옳은 일을 택하겠다”는 원칙의 사람, 지도자의 품격을 인격에서 찾은 인물이다.
이 통찰은 매컬로의 1993년 퓰리처상 수상작 ‘트루먼’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매컬로가 그린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야망이나 천재성이 아닌 인격으로 위대해진 평범한 사람이다. 여타 전기 작가가 트루먼을 현실 정치의 산물로 분석했다면 매컬로는 그를 미국 민주주의의 도덕적 중심으로 그렸다. 대학 문턱도 밟지 못했지만 트루먼은 부통령 취임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해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핵 시대의 개막, 유엔 창설 및 이스라엘 독립 승인, 한국전쟁 참전 등 굵직한 역사적 과제의 책임자로 나섰다.
매컬로는 트루먼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던 이유를 권력을 위대함으로 착각하지 않은 데서 찾았다. 그의 리더십은 화려하지 않지만 도덕적 분별력과 절제에서 비롯된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를 독학하고 매일 성경과 고전을 필사하며 자신을 단련했던 트루먼의 일상은 그의 인격 형성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매컬로는 트루먼을 정직과 책임이 진정한 리더십의 기준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로 되살려 놓았다.
‘평범함 속 위대함’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은 발명가 라이트 형제처럼 비교적 평범한 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위대함을 특별한 지위나 천재성에서 찾지 않는다. 가정과 일터, 신앙의 자리에서 묵묵히 소명을 감당한 이들에게서 역사의 진정한 힘을 발견한다. 이번 유고집에서 매컬로는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역사는 삶의 연장이다.”
인간은 한 시대만을 살 뿐이다. 그러나 그 삶이 다른 시대와 맞닿아 있는 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영원의 한 부분을 위임받았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우리는 평범한 사람의 용기와 양심으로 책임 있게 살아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는 다음세대가 자랑스럽게 이어갈 역사를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박성현(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