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번호 79번, 원소기호 Au인 금은 높은 밀도를 지닌 무른 금속이다. 화학 반응성이 낮고 공기나 물에 부식되지 않는다. 연성(軟性·잡아 늘이기 쉬운 성질)과 전성(展性·두드려 펴지기 쉬운 성질)도 뛰어나다. 변하지 않고, 가공도 쉬우며, 늘 반짝이는 금속이라는 화학·물리적 성질은 일찌감치 인류 눈에 띄면서 ‘화폐금속’이라는 경제·사회적 성격을 낳았다. 금은 17세기 들어 종이돈(지폐)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긴 세월 동안 화폐와 귀금속이라는 독보적 지위를 누렸다.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말(금 태환 정지)과 함께 화폐로서의 기능을 잃기 전까지. 금의 빈자리는 달러 같은 기축통화가 채웠다. 그렇게 ‘불멸의 상징’은 왕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다. 경제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금은 더 빛나기 때문이다.
금값은 최근 들어 무서운 속도로 뜀박질을 하고 있다. 심각한 경기 침체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매섭게 상승하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11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온스당 2617.70달러에 거래됐던 국제 금 선물가격은 1년 만에 400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국내 가격도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인다. 지난해 11월 g당 12만원 수준이던 금값은 올해 10월 22만원까지 치솟기도 했었다. 조정을 받고 있지만 언제든 튀어 오를 준비를 하는 스프링 같다.
금값 상승의 표면적 원인은 두 가지다. 길게 이어지는 저금리가 유동성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넘쳐나는 돈은 주식, 부동산, 금, 가상화폐 가격을 밀어 올리는 중이다. 여기에다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을 매집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경제 위기에 대비하고, 원활한 국제 거래를 위해 외환보유액이라는 비상금을 모아둔다. 보통 중앙은행 비상금에서 금과 미국 국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만큼 안전해서다. 다만 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금보다 미국 국채를 더 많이 보유해 왔다. 미국 국채에는 꼬박꼬박 이자가 붙는 데다 미국은 ‘절대 망하지 않는 나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뒤틀리고 있다. 중국, 인도, 러시아, 튀르키예 등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금 비중을 급격하게 늘리고 있다.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 보유 비중(24%)은 어느새 미국 국채(23%)를 앞질렀다. 미국 정부의 막대한 부채가 못 미덥고, 세계의 정치·경제 상황이 위태로워서다. 크고 작은 분쟁, 전쟁 수준의 무역 갈등과 기술패권 다툼은 그동안 발 딛고 있던 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는, 혹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키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관세 전쟁은 세계 경제를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토대는 허물어졌다.
여러 나라는 자국 산업 보호, 보조금 지급 확대 등으로 대응하며 ‘연결’ 대신 ‘고립’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더욱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정책과 재정지출 확대는 재정적자라는 눈덩이를 더 크게 굴리는 중이다. ‘신뢰의 화폐’ 달러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달러의 힘이 분산되고, 금융 질서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원화 약세, 수출 불확실성 증폭, 지정학적 안보 상황이 맞물리면서 위기는 일상이 되고 있다.
금값 뒤에 깔린 이런저런 원인과 이유는 ‘불안’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인다. 금은 정치·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 자산이니까. 가파르게 오르는 금값은 세상이 느끼는 불안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찝찝하다. 거침없는 그래프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갈수록 불안정해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