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보는 고환율 장기화가 한국 경제 성장을 좀먹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원화 약세에 따른 수출 개선 효과는 미국의 관세장벽 탓에 제한적인 반면 수입물가 상승으로 소비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9월까지 경상수지가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국내로 재투자되기보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도 고환율 고착화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차기 한국경제학회장인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9일 “지금처럼 미국의 관세무역주의가 강화된 환경에서는 고환율에 따른 한국 수출품의 가격경쟁력 회복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의 수출 구조가 과거 원화 약세로 이익을 누리는 가격 경쟁 중심에서 기술·품질 경쟁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주력 품목은 글로벌 수요와 제품 성능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한국 수출 구조상 중간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생산비 부담이 오히려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표한 올해 9월 수출입물가지수(잠정치)에 따르면 수입물가지수(수입상품의 가격 수준)는 지난 7월 이후 석 달 연속 오름세다. 수입금액지수도 전월보다 7.8% 올랐다. 컴퓨터 주변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 중간재에 해당하는 알루미늄, 동과 같은 1차 금속제품 수입 물량이 증가한 결과다.
수입물가 상승은 소비자물가로 번져 소비 위축과 체감경기 악화를 부추길 수 있다. 이미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로 1년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긴 연휴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설명했지만 고환율 장기화 등의 요인을 간과하기 어렵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고환율이 지속되면 수입 비용이 누적돼 결국 판매가에 반영된다”며 “커피나 설탕처럼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됨에도 달러가 국내에서 순환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예상되는데도 환율이 오르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신호”라며 “외환 공급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 투자하는 국내기업이 늘면서 벌어들인 돈을 바로 국내로 들여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내국인들의 미국 주식 투자 확대까지 겹치면서 달러 수요가 계속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고환율이 지속할 경우 최근 수출을 중심으로 호조세를 보이는 한국 경제의 발목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스피 4000 돌파 이후 외국인의 대규모 자금 이탈 역시 한국 경제의 불안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성장률 상향 조정과 자산시장 강세는 기저효과와 일시적 유동성의 결과”라며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혜지 김윤 기자 heyj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