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라면’ 수출 질주… 내수는 레트로 맛으로 반격

입력 2025-11-10 02:23
K라면이 올해도 훨훨 날았다. 라면 수출액은 지난 1~9월 전년 동기 대비 24.5% 상승해 11억3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라면이 이끄는 ‘K매운맛’ 열풍은 국내 거리에서도 체감된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에 ‘라면 라이브러리’ 콘셉트로 꾸며진 편의점 CU 홍대상상마당점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라면을 먹는 모습. 뉴시스

‘K-매운맛’ 열풍이 전 세계로 번지면서 한국 라면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올해 1~9월 라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4.5% 늘어난 11억3000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화려한 해외 실적과는 달리 정작 본진인 국내 시장에선 라면 수요가 정체된 분위기다. 고물가와 소비 위축이 겹친 영향이다. 이런 온도 차 속에서 라면업계는 투트랙 전략을 꺼내들었다. 해외에선 공격적으로 몸집을 키우고 한국에선 ‘그 시절 그 맛’을 소환하는 레트로 감성 전략으로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구상이다.


삼양 1963, 농심라면…‘그 시절 그 맛’으로 내수 재점화


삼양식품은 지난 3일 서울 중구 보코서울명동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신제품 ‘삼양 1963’을 공개하며 라면업계에 불고 있는 ‘레트로 열풍’에 합류했다. 우지(소기름)와 팜유를 섞은 ‘골든블렌드 오일’로 면을 튀기고 우골(소뼈)로 만든 액상 스프로 국물의 깊은 맛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삼양식품이 라면에 우지를 활용한 건 36년 만이다. 1989년 삼양식품은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는 의혹이 확산하면서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시장 점유율이 급락했다. 이후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우지’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삼양 내부에서도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다. 삼양식품은 이날 행사를 일부러 당시 ‘우지 파동’이 발생한 11월 3일에 맞춰 진행했다.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은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날을 새 출발의 날로 삼았다. 정직하게 만든 라면으로 초심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이어 “창업주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이 꿈꿨던 ‘서민을 위한 한 끼’의 정신을 다시 꺼내고 싶었다. 평생의 한을 조금은 풀어드린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제품의 맛 구성에는 ‘원조 국물 라면’의 정서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반영했다. 채혜영 삼양식품 브랜드 부문장은 “우지 유탕에서 우러난 소기름 풍미에 소고기·사골·닭고기 육수를 더해 진하고 깊은 맛을 냈다”며 “무와 대파로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청양고추를 더해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얼큰함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예전의 맛을 되살린 걸 넘어 지금의 입맛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의미다.

‘삼양1963’은 4개입 기준 6150원으로 프리미엄 가격대로 책정했다. 농심 ‘신라면 더 블랙’, 하림 ‘더미식 장인라면’ 등 고급 제품군과 직접 경쟁한다. 이는 삼양식품이 ‘정직의 서사’를 통해 내수 시장에서 브랜드 신뢰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농심은 레트로 전략의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농심은 올해 초 창립 60주년을 맞아 1990년 단종한 ‘농심라면’을 33년 만에 복원했다. 이는 출시 3개월 만에 판매량 1000만 봉을 돌파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5년 출시한 농심라면은 롯데공업이었던 당시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만큼 상징성이 크다. 패키지 역시 당시 디자인을 계승해 복고풍의 매력을 더했다.

업계 관계자는 “농심은 향수의 서사로, 삼양은 정직의 서사로 내수를 공략하고 있다. 중장년에게는 기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낭만과 이야기를 파는 전략”이라며 “정체된 내수시장에 감성 소비를 통해 소비 전환을 이끌어내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K라면, 글로벌 무대로” 농심·삼양 선두, 오뚜기 ‘추격 ’

내수 시장에선 레트로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브랜드 인지도를 둔 승부가 진행 중이다. 농심 ‘신라면’과 삼양식품 ‘불닭볶음면’ 등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시동을 건 오뚜기는 현지 생산 기반 구축에 나서며 추격전에 들어갔다.

농심은 해외 공장을 늘리고 유통망을 확장하며 본격적으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 식품 최초로 미국 월마트 4600여개 전 점포 입점과 유럽 법인 설립 등으로 유통 채널을 넓히고, 부산 녹산 수출 전용 공장의 증설을 통해 생산 능력을 대폭 강화할 계획이다. 녹산 공장이 완공되면 수출용 라면 생산량은 연 7억개에서 12억개로 약 7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동시에 농심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춘 ‘스와이시’(Swicy, sweet+spicy) 트렌드를 반영한 ‘신라면 김치볶음면’을 수출 전용으로 출시하는 등 제품 포트폴리오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농심은 2030년까지 매출 7조3000억원, 해외 매출 비중 61% 달성을 중장기 목표로 제시하는 등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이다.

삼양식품은 해외에서 거둔 성과를 내수 회복에 투입하는 독특한 전략을 택했다. 무려 77%에 달하는 해외 매출 비중의 중심에는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판매 중인 불닭볶음면이 있다. 불닭볶음면의 인기에 힘입어 삼양식품은 지난해 영업이익 3442억원(전년 대비 133% 증가), 순이익 2722억원(115% 증가)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불닭’ 의존도가 과제로 남아 있는 상황 속에서 삼양식품은 신제품인 삼양 1963을 앞세워 내수 시장에서의 브랜드 신뢰 회복과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불닭은 글로벌 성장의 상징, 삼양1963은 내수 신뢰 회복의 상징”이라며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전략을 강조했다.


오뚜기는 해외 매출 비중이 10% 수준으로 다른 두 회사 대비 글로벌 성과가 부진하다. 오뚜기는 해외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자사 영문 사명을 ‘OTTOGI’에서 ‘OTOKI’로 변경해 외국인이 부르기 쉽게 만들었다. 대표 제품인 진라면 모델로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진을 발탁해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를 확장하고 있다.

오뚜기는 중장기적으로 북미 시장을 주력 성장 축으로 삼고 현지화 전략을 본격 가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라미라다 지역에 약 565억원을 투자해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다. 2027년 완공이 목표다. 공장이 가동되면 라면과 소스류를 현지에서 직접 생산해 물류비와 리드타임(주문부터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고 시장 대응 속도도 높아질 전망이다. 황성만 오뚜기 대표는 “제품뿐 아니라 생산과 유통까지 현지화해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