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에 부과한 관세의 적법성을 심리하기 시작하면서 한·미 통상 환경이 다시 안갯속에 빠졌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번 소송으로 한국의 통상 불확실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패소해 상호관세가 무효화되더라도 보복형 품목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우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6일 “대법원 판결 이후 미국이 ‘대미투자는 관세와 별개’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관세가 전제된 투자였다’며 재조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며 “곧 발표될 양해각서(MOU)나 팩트시트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법적 구속력이 약해 결국 재협상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소송에서 패소해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보복형 품목관세를 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안보조항을 근거로 자동차·철강 등 특정 품목에 고율의 개별 관세를 부과해 상호관세와 유사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는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를 불법으로 판단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우리 기업들에 호재가 될 수는 있어도, 트럼프 행정부가 즉각 관세를 철회하기보다 다른 조치를 검토할 가능성이 높아 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이 남는다”고 전망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국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지난달 한·미 관세협상 타결의 큰 틀은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박 교수는 “한국 입장에서는 이미 지난달 세부 협상 타결로 하방 리스크가 해소됐다”고 진단했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대법원 심리가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크지만 한·미 관세 합의의 틀을 흔들 정도의 영향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통상 당국이 ‘트럼프 관세 소송’을 협상의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미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에 패소 판결을 내릴 경우 한국이 대미 투자와 핵추진 잠수함 협력 등 남은 현안을 유리하게 조정할 협상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논리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핵 잠수함 문제를 신속히 추진해 준다면, 한국도 연간 200억 달러 대미 투자안을 빠르게 집행·승인하는 방식으로 맞교환을 시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번 판결 국면을 계기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복원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 교수는 “상호관세가 무효로 판결나면 한국은 오히려 FTA 복원을 본격화할 기회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송 위원은 “한·미 FTA는 이미 의회 비준을 마친 조약으로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폐기할 권한이 없다”며 “캐나다, 멕시코는 USMCA(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 덕분에 10% 미만의 관세만 부담한 반면 한국은 FTA를 너무 쉽게 포기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세종=김혜지 기자 heyj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