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쉼에 대하여

입력 2025-11-08 00:33

유독 바빴던 한 주를 보내고 맞이한 쉬는 금요일. 오후 늦게 업무차 광화문까지 나갔다 와야 할 일정이 생겼다. 짜증 날 수도 있었지만 푸른 가을 날씨가 예고된 터라 한편에선 기대가 됐다. 일정보다 조금 일찍 나가 덕수궁 돌담길을 걷거나, 미술관을 둘러보며 찰나의 ‘쉼’을 누리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사춘기 아들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한 약속을 또 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별일 아니었는데도 배신당한 것처럼 마음이 무너졌다. 아이가 등교한 이후 알게 된 일이라 당장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하필 바빴던 한 주, 남편은 출장이라 집을 비웠고 난 업무로 바빠 내내 귀가가 늦었다. 다 컸다고 생각해도, 이런 때 꼭 구멍이 나는구나. 아들을 향한 화만큼이나 해묵은 워킹맘 자성까지 더해져 감정이 쉬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부정적 감정 속에 휴일 오전은 ‘순삭’됐다.

녀석이 하교하길 기다렸다. 여유 있게 나가 가을을 즐겨보겠다던 계획 따윈 저 멀리 밀려났다. ‘잘잘못을 따져서 어떻게든 고쳐놓고 말리라.’ 안 되는 걸 알면서 또 한 번 고집스러운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아들은 내가 나가야 할 시간이 다 돼서야 귀가했다. 조급한 마음에 아이가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다다다다’ 화를 쏟아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새는 없었다.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 쏘아붙이고 다급히 나왔다.

시간이 빠듯해 버스정류장까지 뛰었다. 목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다행히 제시간에 버스에 올라탔다. 신기한 건 그다음이었다. 가슴 가득 숨이 차오른 만큼 화가 밀려나간 걸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던 감정이 차분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정 끝내고 맛난 혼밥이라도 하자며 맛집 검색으로 생각을 돌렸다. 효과는 확실했다.

그날 일정이 있던 곳은 ‘평화’를 생각하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20년 전 기자 초년병 시절에 만난 취재원을 비롯해 생각도 못한 인연들을 잇달아 만났다. 축하도 하고 반가움도 나누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행운)였다.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들과 감정씨름 하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시간이 촉박해도 여유 있게 걸었다. ‘힙지로’의 불금 인파 사이를 지나던 10~20분, 왠지 모를 만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 아들을 만났을 땐 평안한 마음으로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다행이다’ 감사했다.

나를 잠식했던 감정, 둘러싸고 있던 상황에서 완전히 분리돼 누린 쉼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날의 쉼은 일을 하지 않아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중요한 건 나를 붙잡고 있던 상태, 부정적인 생각, 시달리게 하는 바쁜 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느냐일 수 있다.

쉼이 중요한 건 그저 피로를 풀거나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리되고 멈추지 않고선 일상에서 흐르는 은혜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투고 증명하려 하는 동안엔 이미 주어진 선물을 깨닫기 어렵다. 잠시 떨어져 나왔을 때 비로소 감사의 감각이 돌아온다. 성경은 창조 순간부터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는 말씀엔 안식 자체가 우리 존재가 지향할 목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안식일 영성에 대해 고찰한 고전 ‘안식’에서 유대교 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에게 노동은 목적을 향해 가는 수단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일하는 목적은 결국 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안식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안식의 시작 역시 완전한 분리에서 시작될 것이다. 세상에 매여 있는 생각과 가치, 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경건함을 누려보는 것. 매일 하지 않았던 감사, 돌아보지 못하던 주변을 잠시 멈춰 보는 일을 하는 것이 쉼의 시작일 수 있다.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