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완성차업체 수장들이 잇달아 유럽연합(EU)에 내연기관차 퇴출 계획을 완화해 달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비현실적 친환경 정책이 유럽 자동차 시장을 코로나19 이전보다 더 쪼그라뜨렸다는 위기의식에서다. 한국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산업계가 우려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
6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안토니오 필로사 스텔란티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EU의 내연기관차 규제에 커다란 변화가 있다면 유럽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 사례가 보여주듯 합리적으로 규제를 변경하고 선택의 자유를 회복하면 자동차 제조사들은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반발하는 상황에서도 급격한 전기차 전환에 제동을 건 데 대해선 옹호 입장을 내비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전기차 구매 시 제공했던 세액공제 혜택을 중단했고 차량 배출가스 감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스텔란티스는 이런 미국에서 투자를 늘리고 있다. 향후 4년간 미국에 역대 최대 규모인 130억 달러(약 18조7800억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응하고 전기차보다 수익성이 높은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 판매 확대를 위해서다.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 벤츠 CEO도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전기차만 판매하도록 강요해 시장이 더 위축한다면 EU집행위원회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대로 가다간 유럽 자동차 시장이 붕괴할 수 있다는 경고다. 칼레니우스 CEO는 현재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7월 임명된 프랑수와 프로보스토 르노 CEO도 거들었다. 그는 최근 한 업계 행사에 참석해 “더 무겁고 비싼 차량(전기차)을 만들도록 강요하는 EU의 쓰나미 같은 규제의 재검토를 촉구한다”며 “올해 안에 (내연기관차 퇴출 완화 논의의) 진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자동차 산업의 쇠퇴를 조장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유럽에선 자동차가 코로나19 이전보다 300만대 정도 적게 팔리고 있다. 필로사는 “자동차 공장 10곳의 생산량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설명했다. 수요 부진으로 인해 스텔란티스는 지난달 유럽 전역에서 공장 가동을 멈췄다. EU집행위는 내년으로 예정됐던 자동차 탄소 감축 계획 중간 점검 일정을 올해 말로 앞당기기로 한 상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보다 50% 이상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완성차·부품업계에선 비현실적인 수치라는 입장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KAICA) 등은 “(정부가 설정한 목표는) 부품 산업의 구조조정과 대규모 고용감소 등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내용의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