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석기 (3) “하나님 위해 살겠다” 병상에서 한 서원 지키기로 결심

입력 2025-11-07 03:04
김석기(오른쪽 세 번째) 목사와 김경숙 사모(다섯 번째)가 2000년대 초 교도소 예배 찬양을 위해 연습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금세 잊고 돌아서는 존재다. 얼마나 교만한가. 하나님이 독생자를, 그것도 육신을 입고 보내셔야 할 만큼 우리의 마음은 완고하다. 나는 곧 절망의 밤을 잊었다. 다시 일에 매이고 술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안이 경영하던 T그룹 10여개 회사가 군사정권에 의해 하루아침에 넘어갔다. 작은아버지는 시골 구둣방에서 직공으로 시작해 T그룹을 일으킨 분이었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고, 유식도 자랑하지 않으셨다. 곧은 사업 정신으로, 형님이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며 정직하게 일궈낸 그룹이었다.

어린 시절 명절 때면 부산에서 작은아버지의 지프가 올라왔다. 나는 동네 어귀까지 4㎞를 달려가 차를 기다리곤 했다. 차가 오면 죽어라 뒤를 쫓아갔고 작은아버지는 차를 세우고 태워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취직을 부탁하려 닭을 품고 찾아오고, 딸을 공장에 넣어 달라 줄지어 서곤 했다. 작은아버지와 아버지의 우애, 인자함이 눈에 선한데, 그 정직한 작은아버지의 회사가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는 결심했다. “다시 찾자.” 경기 김포에 ‘하성 산업’이라는 핸드메이드 카펫 공장을 차렸다. 물불 가리지 않고 전국의 몇 안 되는 카펫 공장을 찾아가 직공들을 스카우트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 덕에 밤낮없이 신용장을 받아 중동으로 수출했다. 어느새 병상의 그 밤도, 친구가 전해 준 예수님 이야기도, 하나님께 드린 서원도 까마득히 잊었다.

수출은 잘 됐다. 해마다 중동 왕자가 조선호텔에 묵으며 1년 치 주문을 했다. 나는 복수의 화신처럼 달렸다. 그때, 공장을 싸게 넘겨받도록 도와준 서울 강서구 공항동 은행 지점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한잔하자며 나오셨나 싶었는데, 본인을 장로라고 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내 건강 이야기를 듣고는 “소개할 분이 있다”라며 어느 집으로 데려가셨다.

도봉구의 골목 안,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다. 한국말이 서툰 일본인 아카사카 집사님이 나오셨다. 치유의 은사가 있으신 분이라고 했다. 지점장님 부부와 함께 무릎 꿇고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집사님이 “살려 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나의 서원을 그대로 기도하는 게 아닌가. 기도 가운데 마음을 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눈물이 났다.

아내가 결혼 후 나를 병간호해 온 이야기, 과업과 스트레스, T그룹의 몰락, 하성 산업의 중압감…. 기도 속에 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주님을 잊었지만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다. 이제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님은 한 단계 한 단계 내 인생을 다루시며 간섭하고 계셨다. 강압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를 인정해 주시며 선을 이루어 가고 계셨다. 며칠 뒤 미국 롱비치에서 열리는 PGA 골프 쇼를 다녀올 일이 있어 갔다가 가디나의 개혁신학교를 찾아가 등록할 방법을 알아봤다. 내 마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아내에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말을 잇지 못하던 아내는 다음 날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께 상담을 청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하시던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니, 먼저 남편을 미국에 보내 보라”고 하셨다. 아내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거스르는 건 불순종이라 여겼다. 결국 “가 보라”고 했다.

정리=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