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관세협상 끝의 대한민국

입력 2025-11-07 00:38

한·미 관세협상, 회담 3차례
내용은 후퇴, 결론은 도돌이표

美 이익에도 韓은 ‘선방’ 인식
트럼프 앵커링 효과에 당해

협상 후 국내 투자 공백 필연
무대책이면 미래 희망 없다

집주인이 풍광이 좋다며 전세 보증금을 시세 2억원보다 높은 2억5000만원으로 책정했다. 전세를 구하려는 이가 난감해했다. 집주인은 배려해주겠다며 2억1000만원을 제안하자 상대방이 반색하며 계약한다. 결과적으로 집주인은 이득을 보았다.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 한다. 첫 제안을 대폭 높여 기준점으로 삼아(anchoring) 상대를 흔든 뒤 목표를 달성하는 수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매특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1기 시절인 2019년 1조여원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대뜸 500% 인상하자고 요구했다. 논의가 길어지며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인 2021년에 13.9% 오른 1조1833억원으로 타결됐다. 2014~2018년 평균인상률(5.8%)보다 대폭 뛰었지만 500%에 견줘 싸게 막은 느낌을 줬다.

트럼프 앵커링 효과는 한·미 관세협상에서 보다 진화했다. 미국은 뜯을 거 다 뜯어내면서 우리에게도 ‘괜찮았다’는 착시를 불어 넣었다. 협상 초 트럼프 측은 넌지시 “한국이 일본(5500억 달러) 수준에 맞게 4000억 달러는 투자해야 한다”고 흘렸다. 3500억 달러(약 500조원) 투자+LNG 1000억 달러 구매 카드를 내놓았다. 트럼프는 7월 말 우리 측에게 관세 인하(25%→15%)를 약속하며 엄지척 사진을 올렸다. 500억 달러 절감에 국내서 “선방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 달 뒤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전까지 미국이 ‘3500억 달러 현금 투자’, 비관세장벽 철폐 공세를 폈다. 정상회담 파행까지 우려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피스 메이커’ 칭찬, 기업들의 1500억 달러 추가 투자 약속을 듣고서야 미국은 무리한 요구를 보류했다. 두 번째 ‘선방’ 메들리가 나왔다. 하지만 관세는 여전히 25%였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가 3500억 달러 ‘선불’을 외쳤다. 정부는 배수진 끝에 3500억 달러 중 현금 2000억 달러(연 상한 200억 달러) 분할 지급에 합의했다. 3억원 상당의 모조 금관과 훈장을 챙긴 트럼프는 한국과 이 대통령을 연신 띄워줬다. “선불 막은 게 어디냐” “이 대통령은 외교 천재” 소리가 울려퍼졌다.

돌고돌아 결론은 ‘3500억 달러 투자와 관세 인하’ 하나인데 선방 자축만 세 번이다. 도돌이표 관세협상이다. 내용이 개선됐으면 모른다. 7월 협상에서 3500억 달러 중 현금 투자는 5% 내(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로 최대 175억 달러였다. 두 차례 회담 뒤 현금 지출이 11배 이상 뛰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귀국길에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 달러 투자와 한국 기업들로부터 6000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SNS에 썼다. 산정 방식도 의문인데 일부 미 언론은 “한국으로부터 9500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또다른 앵커링 밑밥일까.

갑 중의 갑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 맞서기는 어렵다. 미국은 최대 수출국이다. 다만 우리가 우크라이나처럼 카드가 없진 않았다. 특히 딴소리 나오지 못하게 협상의 문서화가 필요했는데 소홀했다. 8월 정상회담이 호기였건만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회담이 잘됐다”는 자화자찬(대통령실)으로 눙쳤다. 패착이었다. 유럽연합(EU), 일본 등이 트럼프 리스크를 줄이고 관세 인하 효과를 누릴 때 우리만 소외됐다. 곧 협상 양해각서(MOU)가 나온다지만 너무 늦었다. 원화가치는 정부가 성공적이라던 10월 회담 이후 되레 하향세다. 경제 미래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얘기다.

트럼프 성향상 관세 및 무역협상에 끝이 있을까 싶다. 미국 내 관세 소송 결과가 어찌되든 트럼프가 자신의 정체성 같은 관세 부과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앵커링식 선제 공격과 응전이라는 지루한 신경전이 계속될 것이다. EU, 일본, 대만 등 무역 상대국들을 우군으로 삼아 동병상련의 전선을 넓히고 수출다변화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발등의 불은 국내 투자다. 관세전쟁 이후 국내 투자 축소는 불가피하다. 경제 하강 시기에 투자가 국내외 골고루 충족시키긴 어렵다. 미국 횡포에 맞서 국내 투자를 늘리자는 얘기가 있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기업들이 생산성이 떨어진 한국을 떠나며 지난 10년간 ‘순해외투자’ 비중이 6배 급증했다. 획기적 구조 개혁, 혁신을 해도 추세를 돌릴까 말까 하는데 기업 앞에 노란봉투법, 경직된 주52시간제가 떡 버티고 있다. 미국 투자 쇄도가 트럼프의 팔비틀기 때문만은 아니다. 손 놓고 있다면 관세 협상 끝의 대한민국엔 희망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선방’ 착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