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AI 깐부’가 남긴 과제

입력 2025-11-07 00:37

엔비디아의 그래픽가속장치(GPU) 없이 인공지능(AI) 구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순히 하드웨어 성능 때문이 아니다. 이미 AI 개발 환경이 엔비디아의 쿠다(CUDA) 기반으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GPU는 한 번에 여러 개의 연산을 동시에 하는 병렬 컴퓨팅 방식으로 구동되는데, 당시에만 해도 3D 게임 구현 정도에만 사용됐다. 하지만 일부 대학 등 연구기관에선 병렬 컴퓨팅으로 과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새로운 용도의 가능성을 발견한 엔비디아는 과학자들이 게임 외에 다른 용도로 GPU를 쓸 수 있도록 쿠다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쿠다는 엔비디아가 ‘아직 시장이 존재하지도 않는 곳’을 위해 심어놓은 비장의 카드였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영역에 미리 씨앗을 심는 전략을 ‘제로 빌리언 시장’이라 불렀다. 현재 시장가치는 0이지만 미래엔 수백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시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내의 시간은 길었다. 비디오게임을 위해 엔비디아 GPU를 구매하는 대다수 사용자에게 쿠다는 불필요한 기능이었다. 쿠다를 빼면 더 싼값에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젠슨 황은 고집스럽게 쿠다를 탑재시켰다. 엔비디아 내부에선 ‘쿠다 세금’이라는 표현도 나왔고, 수익 악화로 투자자들에게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결실은 엄청나게 돌아왔다. AI 분야에서 엔비디아 GPU로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신경망이라는 개념은 GPU를 만나기 전까지 AI 분야에서 거의 폐기된 상태였다. 이론을 받쳐줄 성과가 없었는데, 지금 관점에서 보면 충분한 데이터와 이를 처리할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전 계기는 2012년 이미지넷 대회였다. 이 대회는 AI를 통해 100만개 이상의 이미지를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정확도를 테스트한다.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팀의 ‘알렉스넷’은 85% 정도의 정확도를 기록했다. 기존 기술 대비 10% 포인트 이상 개선한 것으로, 해마다 0.1% 포인트 진전을 하던 데서 ‘퀀텀 점프’를 했다. 알렉스넷은 엔비디아 GTX 580 2개로 만들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엔비디아 GPU는 AI시대 필수 장비가 됐다.

경쟁사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GPU 자체는 흉내 낼 수 있지만, 그들에겐 쿠다가 없었다. 쿠다가 처음 나온 2006년부터 이를 필요로 했던 학계, 연구기관 등은 이미 모두 엔비디아 생태계에 편입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AI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 과실이 모두 엔비디아의 것이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전 세계 모든 기업이 몇 년을 기다려서라도 엔비디아 제품을 사려는 것도 결국 쿠다 생태계에 ‘록인’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나라는 구하기 힘든 엔비디아 GPU 26만장을 확보하게 됐다. 젠슨 황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을 하며 AI 시대 ‘깐부’(친한 친구)를 선언했다. AI 공장, 피지컬 AI 등 앞으로 확장될 AI 분야를 한국과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우리나라에는 분명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대규모로 엔비디아 GPU를 도입하는 건 엔비디아 생태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바일 시대 구글, 애플에 겪었던 기술 종속을 AI 시대엔 엔비디아로 반복하는 셈이다. 또 GPU는 삼성전자, 현대차, SK, 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과 정부로 향한다.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는 건 AI 시대에 기업 간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GPU를 구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고 송전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도 문제다. 치맥 파티는 끝났다. 이젠 과제를 할 시간이다.

김준엽 디지털뉴스센터 콘텐츠랩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