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에 관한 성경의 설명 중 인상 깊은 한 장면이 있다. 욥은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이들이 매년 생일잔치를 열어 서로를 초대해 축하했다.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욥은 자녀 숫자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잔치에서 먹고 마시다가 행여 무심중에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한다. 풍요로 인한 나태와 방심을 두려워하며, 이웃의 고통에 둔감함을 미안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자녀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부탁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으리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라는 큰 잔치가 끝났다. 21개국에서 온 정상들이 머물고 정부와 기업, 문화계가 함께 무대를 꾸렸다. 한국은 이번 APEC을 통해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국제대회를 안전하게 치른 것만으로도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다. 여러 달 동안 마음 졸이던 한·미 투자와 관세협정이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게 결론지어져 온 국민이 마음을 쓸어내렸다. 대통령과 협상팀은 영혼을 갈아넣었을 테지만 말이다. 한·중 정상회담도 호의적인 유머와 악수가 상징하듯 서로의 필요성과 역할을 인정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도 주어졌다. 핵추진 잠수함을 승인받음으로, 자주국방에 한 걸음 가까이 가고 핵 강국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놓였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26만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우선 공급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이 인공지능(AI) 시대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K팝, K푸드, K뷰티 등이 외교 행사에서 극찬을 받기도 했다. 주식시장은 활기를 띠고, 국민의 마음과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우리 위상이 이 정도였나” 어리둥절하다가 “아, 이제 대한민국의 시대가 오고 있구나”라며 자부심을 가슴 깊이 느낀 한 주간이었다.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욥의 심정으로 다시 엎드려 양 한 마리의 번제를 드린다. 잔치의 열기와 흥분에 하나님을 잠시 잊지는 않았나 돌아본다. 하나님 없는 자기만족의 자축 파티는 아니어야 할 텐데. 분열의 알고리즘, 차별적 구호, 혐오 가득한 현수막을 보면 이 모든 것을 우리 힘과 우리 의로 얻은 것은 정녕 아닌 듯싶다. 우리 선조들이 흘린 기도의 눈물과 순교의 피 위에,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정신 위에 우리가 서 있다.
또 한 마리 양을 죽이며, 흥겨운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높은 진입장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 역사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데이터로 남은 사람들,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힘겹게 하루를 견디는 어르신들. 만일 이들을 끝끝내 소외시킨다면 극단적인 세력으로 발전해 끝내 사회를 무너지게 할 것이다.
다시 양을 잡기 전 잠시 숙고한다. 우리 잔치의 영광이 역사의 바른 방향에 서 있는가.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를 그렇게 외쳐왔는데, 핵추진 잠수함 소식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환호하는 게 마땅한가. 세계 3위 AI 선도 국가가 된다고 하나, 새로운 시대가 가져올 사회적 격차와 일자리 변화,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우리는 고민하고 있나.
생일잔치를 마친 다음 날 아침 욥의 가정을 상상해 본다. 욥은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짐승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데 다들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어떤 아들은 어제저녁 그윽한 눈빛을 교환하던 마을 처녀를 생각하며 잠결에도 씨익 웃는다. 한 녀석이 툴툴거리며, 작은 소리로 노인네에게 불만을 토한다. 옆에서 아내가 거든다. “거, 이런 날은 늦잠 자게 좀 내버려 두지.” 욥은 아무 대꾸 없이 숯불에 풍구질한다. 잔치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새벽바람이 차다.
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