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하늘이 보내는 신호

입력 2025-11-08 00:32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온갖 곡식이 무르익는 탓에 인간도 덩달아 살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찬바람이 불어 괜스레 헛헛해진 가슴을 음식으로 달래다 보니 몸무게가 시나브로 늘어났다. 살이 오른 얼굴만 보면 맏며느리상이건만 남편이 없으니 그것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단풍을 즐기러 나들이라도 간다면 칼로리를 소모하는 데 도움이 되겠으나 꼼짝없이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해야 하니 살이 빠질 리 만무하다.

하늘이시여, 어째서 저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평생토록 일만 하다가 죽으라고 보내셨나이까, 예? 달덩이 같은 얼굴을 치켜들고 대들어 보지만 푸르른 하늘은 묵묵부답이다.

이다지도 무미건조한 내 인생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그건 바로 첫사랑의 근황을 염탐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물둘에 처음 만났다. 나는 키 크고 잘생긴 그 애를 좋아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애에게는 나 말고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여자가 수두룩했다. 이 여자, 저 여자, 요 여자, 조 여자를 만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 애에게 나는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가슴이 아파 죽겠는데 짓궂은 하늘은 자꾸만 장난을 쳤다. 겨우겨우 잊은 그 애를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거듭 마주치게 했다. 우리는 다섯 번쯤 다시 만나고 여섯 번쯤 이별하기를 반복하다가 내가 서른둘이 되던 해에 완전히 헤어졌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애가 계속 생각났다. 다행히 그 애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서른셋에도, 서른넷에도, 서른일곱을 넘어 마흔이 될 때까지도 나는 그 애를 훔쳐봤다. 이제는 ‘그 애’가 아니라 ‘그’라고 불러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그였다. 나는 한층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잘생긴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잘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마흔하나가 되던 해, 그가 변했다. 유튜브 영상 속 그가 활짝 웃는데 앞니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가지런하던 치열에 가로 0.8㎜, 세로 10㎜의 검은 공백이 새로이 자리 잡았다. 그 자그마한 공백은 그를 영구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치과 치료 중인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얻어터지기라도 한 걸까.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자신의 앞니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채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앞니의 부재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엄지와 검지로 스마트폰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는 커다란 모니터로 그의 구강 구조를 살피기까지 했다. 이런저런 오두방정을 떨던 나는 이내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의 치열이 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내 마음에도 꼭 그만한 블랙홀이 생겼다. 그 블랙홀로 우리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SNS를 통해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메시지 드립니다.” 메마른 일상에 내리는 단비에 노처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답장을 보내기가 망설여졌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앞니가 여전히 부재중이라면 그동안의 안부를 먼저 물어야 할지, 앞니의 행방을 먼저 물어야 할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하늘이시여! 어째서 저에게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안겨주시나이까, 예?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귓가에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또 나쁜 남자에게 휘둘릴까 염려되어 내가 그의 앞니를 가져갔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하늘은 나에게 많은 신호를 보내왔다. 20대 시절 그가 툭하면 휴대전화를 꺼놓았던 건 바람을 피운다는 신호였고, 말할 때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던 건 거짓말을 한다는 신호였으리라. 둔한 내가 그 신호를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하니 이번에는 앞니를 가져가 정을 떼게 했구나. 하늘의 장난에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나는 결국 그를 만나러 가는 대신 일터로 향했다. 쏟아지는 일거리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라는 신호고, 두둑하게 붙은 살은 겨울을 따스하게 보내라는 신호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흰 구름이 싱긋, 윙크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주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