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쪽지] 글을 쓰면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입력 2025-11-08 00:35

글쓰기 과목 담당 교수로 7년을 재직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동료 교수들이 도대체 어떻게 글쓰기 과목을 지도할지 내가 괜히(?) 염려스럽다. 만약에 글쓰기의 결과물만 중요하다고 한다면 AI가 쓰든, 인간이 초고를 쓰고 AI가 고치든, AI가 초고를 쓰고 인간이 고치든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주제를 선정하고 결과물의 완성도를 인간이 판단해서 내놓는다는 이유로 AI를 돌린 사람의 글로 여겨도 된다는 논리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글쓰기는 결과물 때문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여러분도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에 대해 말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한 표현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차리게 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 말이다.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글의 경우에는 그 효과가 더 크다.

생각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문장 하나를 쓰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고 생각 정리를 완벽하게 한 후 글을 쓰겠다고 하면 영원히 글을 쓰지 못한다. 글을 쓰려고 노력해야 생각도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내용의 글을 쓰겠다는 것이 결정되면, 일단 쓰고 나서 고친다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써야 한다. 어느 정도 읽고 나면 일단 쓰고, 또 쓰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자료를 찾고 읽은 자료를 기반으로 더 적합한 표현을 찾아가며 추가로 쓰고…. 하나의 글에서도 이렇게 투입과 산출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 글에 표현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만나면서 좀 더 객관화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점점 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한 번 생각을 정리해서 쓰고 나면 그걸 밑바탕으로 해서 다음 단계로 생각이 나아가게 된다. 나의 경우, 처음으로 책을 썼을 때 쓰고 나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지고 추가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이 생각났다. 일단 표현을 하고 나니 그 표현을 통해 생각을 더 발전시키게 되고 내 마음을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되곤 하는데 글쓰기의 이런 효과를 직감해서가 아닐까 싶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을 ‘알 수 없는 심연’이라 했다. 알 수 없는 심연의 나로부터 길어올려진 생각과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좀 더 알게 된다. 그런데 글쓰기라는 분투를 포기하면 생각을 정리해서 발전시킬 기회, 자신의 마음을 만날 기회를 잃게 된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자신 안에서 떠돌게 되고, 마음은 내 마음인데도 잘 모르겠는 상황이 된다. 내 안에는 ‘표현되고 싶은 나’가 있다. ‘표현되고 싶은 나’를 제대로 표현하려는 분투를 견뎌야만 나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글쓰기를 AI에게 맡겨 버리면 이러한 분투가 사라지게 된다. 바로 그 분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데도 말이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